스데반의 믿음 — 사도행전 · 조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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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스데반을 도우시는 성령

사도행전 7장 54~60절

54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이 예수님의 삶을 닮고 싶어 했던 것처럼 초대교회 성도들과 사도들 역시 스데반을 닮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스데반은 모든 면에 충실했기 때문에 성도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교회 조직의 일원으로 구제와 봉사 그리고 재정 관리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탁월한 변증가이며, 지금 우리가 듣고 배울 수 있는 멋진 설교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흔히 시대와 환경이 사람을 만들어 낸다고 말합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시대와 환경 그리고 조직의 영향을 받겠지만, 성도들은 절대로 한 시대와 환경과 조직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이 그 시대를 변화시키고, 성령으로 변화 받은 사람들이 그 세대를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며, 부름을 받은 인생들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사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스데반이 이 위기의 상황을 말씀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기에 사도 바울이라는 귀한 그릇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는 모든 환경이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성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환경을 이용하지만, 성령 충만한 성도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을 드리므로, 환경 자체가 성도의 삶과 계획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1절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대제사장이 스데반의 말을 듣고 사실이냐고 물었을 때 너무나 위험한 순간에 처했지만, 스데반이 위기의 순간을 설교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공회에서 거짓 증인에 의해 불법재판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변명의 기회를 주었을 때, 그는 목숨을 구하려고 인간적인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가진 성도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이든 믿음으로 전도의 기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성도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병이 들거나 가정이 절망적인 상태가 되면, 믿음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불안에 싸이게 됩니다.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고 고난의 시간이 길어지면 더 쉽게 불신앙과 절망에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원망하고 좌절하며,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연단을 받느냐고 불평합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봉사하고 헌금도 많이 했는데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원망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연단의 시간을 원망만 하다가, 소망의 끝자락조차 잡아보지도 못하고 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연단에 연단을 받으며 자신의 모난 모든 부분이 깎이는 아픔을 겪고 나서야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굴을 통과하는 것이 아무리 싫어도, 하나님께서 이제는 끝났다고 말씀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벗어날 방법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는 것은 그 자녀를 온전한 자녀로 만드셔서 합당한 곳에 쓰시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학식이 전혀 없는 베드로에게 지혜를 주셔서 바리새인들이 놀랄만한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며, 지식과 학식이 많은 사도 바울이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을 때, 비로소 복음 서신을 쓰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모진 시간이 지나며 자갈들이 동그란 모양을 갖추는 것처럼 연단을 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깎이고 또 깎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동그란 모양을 가졌을 때, 비로소 영적인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믿음과 신앙을 보여 드릴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내려놓고, 욕심과 정욕을 버리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중요한 것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수준과 관심입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에게는 구약으로 시작했고, 아덴에 사는 이방인에게 이방신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상대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씀으로 설교해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은 이들이 알고 있는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성경을 요약해서 아브라함, 이스라엘 백성들의 훈련과 교훈, 여호수아, 사무엘 상하와 역대 상하, 그리고 성전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7장 51~53절에 메시야를 예언한 선지자들을 절대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율법이 예수를 증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가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그들을 향해 이렇게 구약 전체를 정리해서 전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과 허위를 들춰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설교는 이렇게 사실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구약 역사의 개관을 끝내고 스데반이 던진 폭탄선언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예언자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 백성, 장로들은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영적인 교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약속받은 백성이고, 율법을 받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며 교만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통적인 신앙만 옳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너희들은 진리를 진리로 듣지 못한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사실적이고, 도전적이며, 충격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듣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 무엇인가 행위로 보여야만 믿음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믿는 것이고 행위가 아니라 그냥 믿어지는 믿음이 구원이라고 말해주면,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의를 버리지 못하고 분노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내가 주일을 지키고, 직분을 감당했으며, 넘치도록 헌금한 이 모든 것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 것을 했기 때문에 믿음이 충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하심을 믿는 성도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인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구원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이고 은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의를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사도행전 7장 52~53절

52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회당에 모여서 스데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지자를 핍박했거나 죽였던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의인이었기에 율법을 철저히 지켰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악인은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택함 받은 선민이고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너희가 선지자들을 죽이고 메시야를 죽인 악인이라는 엄청난 말을 쏟아내었으므로 그들은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목숨처럼 지켜왔던 신앙을, 메시야를 죽인 신앙이라고 말하는 스데반을 살려둘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말을 하면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진리를 말해주는 사람을 핍박합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그들에게 구약을 전한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사실대로 전해준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아예 듣지 않았고,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 큰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사무엘하 11장과 12장에 보면, 다윗은 죽을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면을 받아들여서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때, 그는 성에 남아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밧세바를 강제로 취하고 나자, 그의 남편인 우리아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아를 전쟁터 맨 앞에 세우라고 지시했고, 우리아가 화살에 맞아 죽자 밧세바를 아내로 삼는 완전 범죄를 꾀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속이고 밧세바를 취했지만, 다윗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그의 악함을 책망하셨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비유를 들어 말하기를, 어느 마을에 부한 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는데 가난한 사람은 작은 암양 새끼 하나밖에 없으므로, 같이 자고 같은 잔에 함께 먹으며 자녀처럼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왔는데 부자는 자기 양을 잡는 것이 아까워서 가난한 사람의 양으로 손님을 대접했으니, 왕은 그 부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다윗은 크게 분노하며 하나님께 맹세하기를, 그 부자는 마땅히 죽여야 하며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새끼를 빼앗았으니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인데, 완전 범죄라고 생각했던 당신의 죄를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신다고 전했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기 위해서 기름을 부었고 사울의 손에서 구원했으며 부족함이 없이 주었고, 만약 부족했다면 더 주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했느냐고 진노하셨습니다. 그 죄로 네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며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네 처들이 백주에 다른 사람과 동침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완전범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한 모든 일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회개를 했으며, 침상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는 왜 이렇게 울면서 회개했을까요? 비록 육신은 죄를 졌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책망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회개했던 것입니다. 그는 왕이기 때문에 나단을 죽일 수도 있었고, 회개하지 않아도 아무도 탓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이기 전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절대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알았을 때, 처절하게 회개했던 다윗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스데반 앞에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쪽이 정의이고 선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의로운 반열에서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악이라고 말씀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대로 신앙생활을 했고 자신의 믿음이 맞다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자 메시야와 선지자를 죽인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다윗처럼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54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진실된 말을 들었을 때, 사람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자신을 돌아보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두려워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다윗 같은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진실된 말을 들었을 때 이를 갈며 화를 내고 상대를 핍박하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은 솔직히 상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화를 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리라면 굳이 화낼 필요 없이 결과를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이를 갈고 대드는 것은 상대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변명을 하든지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악한 영의 조종을 받기 때문에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왜 저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사탄의 조종을 받으면 누구나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기 전에 여러분은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선한 사람은 상대가 분노하고 살기등등할지라도 성령이 충만한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위기에 처했지만, 성령께서는 스데반이 그 상황을 믿음으로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손에 돌을 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천사의 얼굴을 하고 그들을 용서하면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데반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시고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여주신 것은, 스데반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옳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인생은 두 팔을 벌리고 계신 예수님의 품에 안기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이곳으로 오라고 힘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진리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영의 눈을 열어 주시며, 성령으로 도와주시므로 스데반처럼 원수를 용서할 수 있고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고 계십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사백삼십 년 동안 종살이할 때도,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 않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사면초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고난의 노래가 가는 곳마다 들릴 때, 그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혼자 고통을 당하도록 버려두시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언제든 성도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워할 때 가장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시몬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이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지 못하고 새벽에 뭍으로 돌아왔을 때 바닷가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밤새 고생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세상일에 지쳐서 자신들 앞에 서 계신 부활의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슬픔이 더 크면, 전능하신 주님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고난과 연단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면 도와주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지만, 우리는 내 환경이 너무 두렵고 고통스러워서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돌에 맞으면서도 보좌에 서 계신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어떤 믿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나기도 하고, 자신의 고통만 들여다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 때문에 가까이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응답을 들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계속 연단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은 지금 비록 돌에 맞아 죽어가지만, 이 고통은 한순간이며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기에 얼굴은 빛날 수 있었고 기쁨으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항상 하늘을 우러러보며 살았기에 그의 마음은 이미 천국에 가 있었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자신이 소망하고 있는 그곳이 더 소중했으며, 자신의 생각보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눈이 다 눈이 아니고, 귀가 다 귀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입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진리를 듣지 못하는 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과 주님의 나라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성도라고 귀하게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했던 스데반은 복음을 당당히 전했고,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 영광의 빛이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의 얼굴에서 빛을 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충만함이 있으면, 성도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 그 광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스데반을 앉아서 맞이할 수 없어서 보좌에 서서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인격을 갖고 계시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스데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주셨으면서도 스데반의 고통을 당연하게 생각하시지 않는 예수님을, 지금 저와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영접하려는 주님을 보면서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스데반처럼 여러분도 진리 안에서 그 영광을 덧입기 바랍니다. 스데반처럼 목숨을 드려 순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순교는 믿음과 진리의 말씀을 지키고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데반처럼 당당하게 진리를 전한다면,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아 이 땅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세상을 향해 영광의 빛을 드러내는 귀한 성도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스데반의 믿음 · 스데반을 도우시는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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