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명을 사랑으로 감당하라 — 고린도전서 · 조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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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그리스도 안에서 여성은 직분을 받을 수 없는가?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말씀

2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7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저는 목사는 당연히 남성일 것이라는 사회구조 속에서 십 년째 여목사로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만났을 때, 늘 이 문제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 자신이 우울하고는 합니다.

예수님도 차별하지 않던 성별의 문제를 가지고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여성이 목사직분을 받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분은 자신도 여성이면서도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목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씀을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제가 여덟 번의 주례를 했는데 주례를 할 때마다 당연히 주례는 남자들이 할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제가 주례로 소개되었을 때 놀라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성이 주례를 할 수 있느냐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는 남성을 위주로 돌아가고 있고, 회사에서도 아무리 뛰어난 여성이라 할지라도 동일한 조건이라면 남성들이 훨씬 빨리 승진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이런 시스템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 틈을 비집고 여성이 설 수 있는 자리는 그리 넓지 않습니다.

세상이 남성을 위주로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까지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목회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며, 여성은 남성을 가르쳐서도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성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근거를 사도바울이 서신서에 기록한 말씀을 가지고 정당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토록 여성들이 복음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던 바울이 이런 구절을 썼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서신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하나라고 그토록 외쳤건만 몇 구절의 말로 여성들이 나아가야 할 문을 닫고 있다면,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우리는 한번쯤 살펴봐야 합니다.

물론 저는 사도바울이 기록한 그런 구절들이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을 끝으로 다시는 이 문제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약 구원의 문제가 한 가정의 가장이 믿음을 가져야만 온 가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남성이 목사가 되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면 여성들은 교회는 물론 가정에서도 잠잠해야 합니다.

가장이 믿음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여성들은 남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무조건 복종하고 종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믿음을 버리면 온 가족이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시 남성들만 목회자가 되어 말씀을 가르칠 특권이 있다면 성령께서는 여성들이 말씀을 깨닫는 은혜를 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구원이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이 문제 역시 타당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할 때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 역시 성별을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부모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자녀들이 믿지 않으면 그 자녀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고, 부부가 아무리 금슬이 좋아도 믿음이 없으면 한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동생이 믿음이 없으면 누나가 가르칠 수 있어야 하고, 남자성도가 말씀을 모르면 영혼구원을 위해서 여자성도가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늘 성별이 문제가 되는 것은 고린도전서 11장과 14장, 그리고 에베소서 5장, 디모데전서 2장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남성을 가르치지 말며, 직분은 남성에게만 줄 수 있다고 기록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쯤에서 여성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분들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재림 나팔소리가 났을 때 남성들이 여성들의 손을 잡아줘야만 재림하신 그리스도께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팔소리는 남성들만 들을 수 있어서 나팔소리를 들을 수 없는 여성들에게 알려줘야만 여성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미혼인 여성과 남편이 일찍 소천하신 부인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 모두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헌데 굳이 교회에서 직분을 주는 문제를 가지고 고집을 피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전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 자기의 믿음으로, 자기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은혜의 시대에 살면서 여성이 교회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부정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목사님들로부터 신학을 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십 년이 넘도록 거절했고, 성경을 백 번 넘도록 읽으며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아니 신학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그 즈음에 제 마음이 목회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불이익을 당할 때마다 마음이 힘들어서 목회를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목회의 길로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목회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거절하던 나를 연단과 연단을 통해 이 자리에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도 여성에게 직분을 주지 않는 교단들을 보면서 정말 저들이 옳은 것일까? 고민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수록 그것은 사람의 판단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미국의 진 에드워드목사님이 쓴 ‘하나님의 딸들’이라는 책을 근거로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진 에드워드 목사님은 성서가 남성중심 성향으로 해석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모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책을 집필했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에 대한 해석과 여성의 지위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잘 설명해 놓았기 때문에 이론적인 부분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김은희집사님이 계시지만 방송을 위해서 작가로서 글을 쓸 때 반드시 작가의 사상이나 성향 그리고 지식이 포함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방송 속에 내레이터의 말을 들으며 김은희집사님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그리고 조은희집사님 공연에 가서 음악을 들을 때면 조은희집사님의 말소리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합니다.

이처럼 작가가 글을 쓸 때나 음악가가 곡을 만들 때, 그 사람의 사상과 성향과 지식의 정도가 그 안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신약을 번역한 제롬 역시 사도바울이 전한 말 그대로 정직하게 번역하기 보다는 자기의 사상을 조금씩 섞어서 그 뜻을 오역했습니다.

A.D. 405년에 시작 된 이 오역은 여성에 관한 것인데, 세기를 거듭하면서 오늘까지도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아도 예수님과 사도바울은 여성을 전혀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이 여성들의 도움으로 사역을 감당하면서 여성을 평등하게 세워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과 제롬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여성의 지위가 억압된 것입니다.

그리스의 세계관은 중동을 정복한 B.C. 300년 이후에는 이스라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스의 가치관은 유대인뿐 아니라 그 이후 기독교인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그리스의 정신적 지주였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인 플라톤 그리고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고,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의 정신을 온 세계에 심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영웅들은 여성은 애초 신이 내린 형벌의 결과로 창조되었고, 여성은 오직 성적 만족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이름이 남성들 사이에 거론되어서는 안 되고, 칭송을 받아서도 안 된다는 사고방식을 이들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제롬은 여성은 오직 자녀 출산을 위해서만 성관계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 사색가였습니다.

이러한 제롬의 생각이 로마 가톨릭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제롬의 금욕주의는 수도원시대의 발흥을 가져왔고, 그 사상을 받은 사람들은 악의 중심인 여성에게서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지도자들의 사상이 이렇기 때문에 아테네 여성들은 숨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시장에 가는 것도 남성들이 했고, 사회활동이나 야외에 나가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교육을 받지 못했고, 처음 본 남성과 결혼해야 했으며, 최소한으로만 보고 듣고 질문해야 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여성은 아무거나 보거나 듣거나 질문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사상을 가르쳤던 제롬이 신약성경을 번역했다면 그는 여성의 비중을 최소한으로 두고자 노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롬은 로마 가톨릭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어 가톨릭 역사상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5세기에 로마 가톨릭은 제롬의 번역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성령의 영감을 받은 유일한 성경 번역본이라고 공표했습니다.

이 발표가 있은 후, 제롬의 번역이 아닌 다른 성경을 읽다가 발각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형을 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제롬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병적일 정도로 여성을 죄인 취급하는 사람이 바로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제롬의 여성관을 이어받은 사람 중에 어거스틴, 마르틴 루터, 장 칼뱅은 모두 제롬의 번역을 받아들였고, 이들도 결코 여성에게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제롬이 성경을 번역할 때 두 명의 여성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제롬은 그 여인들의 노고를 기록했는데, 나중에 교부들이 발견하고는 두 여성의 이름을 지우고 그 대신 덕망 높은 형제들이라고 기록해 넣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살던 이방 철학자들이 그들의 이교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 중, 클레멘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성은 이성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존재다.

그러나 여성은 자신을 성찰하지도 못할 만큼 부끄러운 존재라고 하면서 남성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여성이 얼굴을 가려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교회사에서 매우 존경 받고 있는 터툴리안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여성을 악마에게 이르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성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형벌을 받는 것이며, 여성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고 가르치면서 여성을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터툴리안은 고린도전서 14장을 근거로 여성들에게 침묵하라고 명령했고, 여성은 세례를 베풀거나 노래하거나 기도하거나 가르쳐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심하게 타락한 바람둥이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서 고백록, 삼위일체론, 신국론 등 많은 저작을 발표했지만, 그는 여전히 여성을 낮게 평가하면서 아담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쳤습니다.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로 기도했고, 그 응답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어거스틴이었지만,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고 말했고 인류의 타락도 전적으로 여성의 잘못이라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는 여성은 짐승처럼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남성을 가르칠 수 없다고 가르쳤는데, 그때 알렉산드리아에는 히파티아라는 뛰어난 여성이 있었습니다.

히파티아가 수학과 철학에서 키릴로스의 오류를 증명하자 키릴로스를 따르던 수도사들이 교회 건물 안에서 히파티아를 죽여 그의 뼈에 붙은 살을 다 뜯어내어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 드리는 것은 지도자들이 어떤 사고를 가졌는지 우리가 알아야만 지금 얼마나 큰 잘못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시리아의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요한 크리소스톰은 동방교회의 최고의 연설가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길, 여성의 지위가 낮은 것은 단순히 인류가 타락한 결과만은 아니며 여성은 창조된 그 순간에도 열등한 인간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상은 권위를 동반해야 하는데 남성만이 그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으나 남성은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은 가장 하등한 동물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교적 시각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의 사상입니다.

1세기 말엽의 초기기독교에서는 여성 그리스도인의 위치와 시각이 높이 평가되고 평등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로 회심한 철학자들의 여성관이 기독교 전체를 오염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274년에 사망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도사이며, 가톨릭의 일등 신학자였습니다. 그의 여성관이 개신교 신학으로 들어와서 개신교를 더 낙후시켰습니다.

아퀴나스가 말하길 여성은 불완전하고 형편없는 존재다, 남성의 혜안이 탁월하기 때문에 여성은 본질적으로 남성에게 종속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가 그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여성은 긴 머리를 가져야 한다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아퀴나스 역시 제롬이 번역한 성경 외에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결혼한 사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노예로 팔 수 있다고 공포했고, 교황 이노센스 3세는 1139년에 모든 사제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어 부인들을 첩으로 분류시켰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결정을 하자 사람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여성들은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1322년에 열린 종교회의에서 여성은 교회묘지에 묻힐 수 없다고 선포하자 여성이 악마의 힘에 휘둘리는 것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상식처럼 됐습니다.

때마침 야곱 스프렝거(Jakob Sprenger)가 쓴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그 책은 마녀인 여성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심하게 고문하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 결과 백만 명의 여성이 화형을 당했고, 고문을 받다 죽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고통을 당하며 억울하게 죽어가야만 했던 여성들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종교개혁자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종교개혁을 단행한 마르틴 루터 역시 여성이 열등하고 악하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는 개념을 거부했고 여성을 교회의 리더십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는 인간이 타락한 책임을 여성에게 물었고, 여성은 미신과 신비주의에 빠져들 가능성이 남성보다 월등히 높다고 설교했습니다.

장로교인들이 존경하고 있는 칼빈 역시 비열한 인간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남성에게만 땅을 다스릴 권한을 위임하셨고, 성직자인 남자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킹제임스 성경을 만든 제임스왕은 여성을 반대하는 마녀들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가 말하길 여성을 교육하는 것과 여우를 길들이는 것은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여성이나 여우를 가르치는 것은 그들을 더욱 교활하게 만들 뿐이라고 말하며, 악마연구라는 학술 논문까지 써서 여성들의 사형집행을 강력하게 찬성했습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제임스왕의 시각은 킹제임스 성경뿐 아니라 사실상 그 이후의 모든 번역본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한번을 제외하고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부를 때 항상 브리스길라가 앞서서 기록되어 있지만, 사도행전 18장 26절에서 브리스길라를 뒤에 놓음으로써 이 순서를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 11절에 나오는 헬라어 ‘헤수퀴아’를 여자는 ‘잠잠히’라는 말로 번역하여 절대로 말하지 말라는 것으로 번역했고, 같은 ‘헤수퀴아’를 데살로니가후서 3장 12절에서는 ‘조용히’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잠잠히, 남자는 조용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디아코노스’를 번역할 때,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집사’로 음역되었지만, 바울이 로마서 16장 1~2절에서 여성인 ‘뵈뵈’를 부탁한다고 하는 대목에서 ‘뵈뵈’를 ‘집사’가 아닌 ‘일꾼’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여성을 차별대우하려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오역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흘러온 역사는 여성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동일하게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의 권위 아래 짓밟히고 만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가르친 그 말을 진리 안에서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금도 어리석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의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이 교회에서 힘을 얻자 교회는 진리의 말씀과 믿음보다는 세상의 권력과 물질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를 세울 때도 겉으로 보이는 외적인 조건을 중요시하고, 성도들 역시 직분을 받을 때 물질을 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부유함이 축복이라고, 신앙관 자체가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 함이러라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시대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남성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혼혈인인 사마리아인을 멸시했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사마리아로 가셨고, 우물가에서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때마침 다섯 번이나 이혼한 한 여성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 여성은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틈을 타서 우물에 온 것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남성이, 그것도 유대인이 대낮에 말을 건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성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남성들이 여성을 자녀를 낳는 도구로 보고, 노예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있는 이때에 예수님은 그 여인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인데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시며, 그녀가 지금 몇 번 이혼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그녀의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그녀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셨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믿음의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성별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받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성령과 진리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주어졌으므로 이제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여인과 대화하고 계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유대인의 사상을 벗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유대인도 아닌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고 계신 예수님을 보면서 그들은 당황한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24장 22절에, 누가가 기록하기를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기록을 통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후에도 여자들이 제자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남성들이 여성들을 노예보다 못하고 짐승보다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는 이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모든 남성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거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차별 없이 믿음으로만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9절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이것은 사회구조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 것입니다.

마리아가 남성들 사이에 끼어서 천국에 관해 말씀을 배우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의 언니 마르다가 식사를 준비하면서 자기만 일하고 있다고 불평을 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성은 있는 듯 없는 듯 일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제자의 한 사람으로 대하고 계셨으며, 여성이 자기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세워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여성을 짐승이나 재산이 아닌 인간으로 대하시며, 여성의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훗날 예수님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사역하실 때 필요한 재정을 많은 여성들에게 도움 받으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수가의 아내 요안나와 수난나와 또 다른 여러 여성이 함께 자기의 소유로 주님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약 120명이나 되었는데, 이 120명이라는 수는 남자만 센 것이 아니라 여성들도 모두 합한 수입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그들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님의 사역을 전했는데, 성경은 남성과 여성들을 모두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성령의 권능은 남성은 물론 모든 여성에게도 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구원을 위해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지 않으셨고, 동일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여성을 직분을 줄 수 있다, 없다 논쟁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여성은 직분을 받을 수 없는가’ 첫 번째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두 번째 설교는 여성에게 직분을 주는 것을 반대하는 성경말씀을 가지고 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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