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만 사는 나라 · 조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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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바울(1)

사도행전 20장 17~31절

17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가지치기를 해 주어야 합니다. 잘 자라지 않는 가지들을 잘라줘야만 실한 가지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더 많이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지를 자르는 것이 아깝더라도 잘라줘야만 양분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는 필요 없는 가지는 없습니까? 아무리 여러분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면 단호하게 잘라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영적으로 아주 혼탁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리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선과 악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믿음을 지키기 바랍니다.

바울에 대한 설교는 두 번에 나누어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그는 거듭남을 경험한 후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진심으로 자신의 의를 버리는 계기가 되었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영적 성장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6~7절

6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7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누가와 바울은 디아스포라의 관습에 따라 무교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바울은 무교절 절기를 지키면서 유월절 양이 되신 예수님을 생각했을 것이며,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맞는 절기는 그에게 다른 의미로 느껴졌을 것이며, 자신도 율법대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자기를 세워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사명을 잘 감당하겠다는 다짐도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틀 걸리는 거리를 닷새만에 갔다는 것은, 날씨가 매우 좋지 않았지만 기다리는 성도들을 위해서 가려고 노력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했으며 힘에 지나도록 노력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처음에 유대인들과 같이 안식일에 모였지만, 이제는 주일날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음 날 드로아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밤 늦도록 강론하였습니다. 다락방에는 많은 성도들이 모였는데, 하루 종일 일하고 예배에 참석한 유두고가 창에 걸터앉아 말씀을 듣다가 완전히 잠에 빠져서 삼층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삼층에서 떨어진 유두고를 살린 사건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왜 굳이 졸다가 창밖으로 떨어진 유두고 사건을 기록했을까요? 누가가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졸다가 밖으로 떨어진 유두고보다 그를 살린 사도 바울의 신앙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기록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의사였으므로 아마도 유두고가 땅에 떨어졌을 때, 가장 먼저 진찰을 했을 것이며 의사 소견으로 사망 판정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두고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하면서 성도들과 날이 새도록 말씀을 전하고 떡을 나누었습니다. 물론 유두고는 날이 새자 사도 바울의 말처럼 살아났습니다. 분명히 죽은 것 같은 유두고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보는 영적인 눈,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서 생명을 보신 것과 같은 능력이었습니다. 생명이 끊어진 사람에게 생명이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므로, 바울이 유두고를 하나님께 맡기고 복음을 전한 것처럼 성도들은 어둠에 갇힌 세상을 향해 진리를 전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도 안 된다고 단정짓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정말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결코 부끄럽게 하시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들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4~5절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성경에 보면 바울의 이름이 두 가지로 불리는데, 사울은 히브리어이고 바울은 헬라어인데 회심 후에는 그를 주로 바울로 불렀습니다. 바울은 베냐민 지파로서 길리기아 다소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질 만큼 재력과 명성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동년배들보다 더 율법을 지키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를 자세하게 전하는 것을 듣고도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자 사울은 예수를 향한 분노가 더욱 커졌습니다. 하지만 훗날 자신이 스데반과 똑같은 고백을 하며 죽는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을 것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진심으로 기뻐했고, 이렇게 교회를 열심히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중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을 잡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그리스도인을 잡아서 이 그리스도교를 말살시킬까 오직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를 확장할수록 유대인들이 기득권을 빼앗기기 때문에 사울은 마음이 급했으므로 핍박을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울은 율법을 공부한 바리새인이므로 선민이라는 긍지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감히 유대민족과 예루살렘의 성전과 율법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않는 유대인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이 성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전하자 분노한 유대인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것을 보면 사울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그 때 하늘에서 강한 빛이 비추면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인데 어찌하여 나를 괴롭히느냐’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왜 이토록 집요하게 성도들을 핍박하느냐는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으로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울에게 강한 빛과 음성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사울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강한 빛과 말씀에 놀라서 정신이 없었던 사울은 성으로 들어가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기 위해서 달려가던 그가 자신을 높여주던 세상조차 볼 수 없도록 육의 눈을 잠시 닫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한 빛이 탐욕스럽던 눈을 감겼고, 율법에 매여 있던 눈을 감겼으며, 성도를 핍박하던 악한 사탄의 종의 눈을 감긴 것입니다. 이 때, 자신들을 잡으러 오던 사울이 소경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보호하셨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세상과 하나님을 향한 신앙조차 붙들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 동안 무엇을 위해서 충성한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는지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그리스도를 인정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고, 죽어가는 스데반을 보면서도 불쌍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왜 천사와 같은 얼굴로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를 했는지 그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구세주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스데반의 신앙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지금까지는 성도들을 핍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는 처음부터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니까 영적인 눈을 뜨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의 기도가 아니더라도 바울의 눈을 치료하실 수 있지만, 굳이 아나니아에게 부탁하신 것은 그동안 아나니아가 복음을 위해 충성했던 그 헌신을 축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건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나니아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 믿음의 형제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던 사울을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면 기쁨으로 순종하겠습니까? 그가 눈을 뜨면 또 내 형제들을 죽일 수도 있는데 기도하겠습니까?

저는 아나니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얼마나 갈등했을지 알 것 같기에 아나니아가 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성도를 옥에 가두는 사울을,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기도해 주는 아나니아를 보면서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본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나니아가 만약 끝까지 거절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직접 혹은 다른 능력자를 통해 사울의 눈을 뜨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자신의 감정보다는 순종이 먼저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훗날, 사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면서 아나니아는 하나님께서는 역시 인간과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인간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 귀한 믿음을 보시고 보좌에 서서 그를 맞이하던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섬기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부르시고 또 그를 성도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는 성도들을 죽인 사울을 부르시고 치료하시는 이 하나님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악한 사울과 같은 자를 이방인의 전도자로 사용하시려고 했으면, 믿음이 좋은 스데반과 같은 사람을 죽이지 말고 사용하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에는 사울보다는 믿음으로 충만한 스데반과 같은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 하나님께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악한 사울을 고쳐 쓰는 것보다는 충만한 스데반이 헌신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 빨리 죽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람과 믿음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잘 살아야 하고, 건강해야 하며, 원하는 대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기준에 벗어나게 되면 죄가 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 것이라고 판단하거나,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없다는 말을 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선악과를 먹는데도 말리지 않는 하나님, 자기의 백성을 430년 동안 종살이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신 하나님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이므로 함부로 저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고, 그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도 꼭 이해가 되었을 때 순종할 것이 아니라, 말씀이 가라고 하시면 가고 서라고 하시면 서야 할 것입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났고, 아나니아의 기도로 눈이 밝아지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바울이, 그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믿음이 생기자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겠다는 다짐을 한 것입니다. 이런 다짐은 폭군 네로가 그리스도교를 탄압할 때, 네로의 후궁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다가 참수를 당하는 순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는 순간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7~8절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지금은 믿음으로 거듭난 바울이지만 그는 세상적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부터 끊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화되어야 하는데, 인간적으로 즐기고 의지했던 쾌락이나 습관이나 사람이나 환경을 끊는 노력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부모와 형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바울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누렸던 물질과 권세는 물론 최소한의 자존심까지도 지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바울처럼 세상의 권세와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하는 자리에 서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사람은 소유가 적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각처럼 쉽게 결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힘으로 삼았던 세상을 먼저 내려놓아야만, 버린 세상을 다시 담을 수 있는 영적 권세의 그릇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도 여러분이 가진 그릇이 감당하지 못하고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바울은 자신의 영적 그릇을 크고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변함없는 신앙을 보여드렸으며, 고난과 연단이 기다릴지라도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세상은 소유가 많아야 높임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교회는 죽어야 하고,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니까 갈등이 심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안개와 같기에 죄 된 마음을 버려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세상을 움켜쥐고 있다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 모든 것이 안개라면 어쩌겠습니까? 바울은 어제까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했지만, 주님을 영접한 후 진리에 대한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바울처럼 돌이키지 않고 중간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은, 사탄의 조롱과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며 돌아갈 영원한 집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율법의 지식은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도구가 되었고, 자랑이었던 가문과 신분은 로마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지식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더 차원 높고 참된 진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힘으로 여겼던 것을 모두 해로 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깨닫고 은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수준 높게 여겼던 세상의 학문이 초등학문 같이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학문에는 답이 없지만 진리는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말씀을 참된 진리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금까지 힘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누리던 세상 것을 배설물로 버리고, 목숨을 다해 헌신하겠다는 바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9장 27절에 보면, 바나바는 바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것과 주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과 주님을 만난 즉시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어떻게 담대히 선포했는지 전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을 맡기실 때 동역자를 항상 준비하십니다. 모든 선지자와 제자를 볼 때, 늘 좋은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좋은 동역자를 여러 명 허락하셨습니다. 바울 곁에서 말씀을 함께 전한 동역자도 있고, 바울과 함께 옥에 들어가서 핍박을 받으며 찬양하고 격려하던 동역자도 있었습니다. 눈이 아픈 바울에게 눈을 주겠다는 동역자가 있는가 하면, 바울이 말씀만 전하도록 물질적으로 평생 도운 동역자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 사역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 중에 바나바는 좋은 인격을 가지고 있던 동역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낮은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든 섬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구제와 봉사로 존경을 받고 있던 바나바가 바울을 향한 제자들의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재에 나서 주었습니다. 성도를 죽이던 바울이 회심했다는 것을 의심하던 제자들을 설득하여 바울이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바나바의 신앙과 인격은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은 내 것을 빼앗거나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을 동지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바울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나바처럼, 직분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깨닫고 내 생각을 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셨는데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선교 사역을 하다가 거짓선지자 박수 엘루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를 하였고 총독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거짓말로 방해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0~11절

10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바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 엘루마를 크게 책망하며, 마귀의 자식이여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주님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될 것이라고 저주하였습니다. 바울의 저주로 엘루마는 소경이 되었습니다. 이런 기적을 행하면서도 바울은 주님의 손이 마귀의 종이 된 너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높여 드렸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바울이 말씀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그의 손수건만 올려놓아도 병마가 떠나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바울의 개인신상 정보가 없을 정도로 바울은 주님만 선포하였고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순교한 사람입니다.

엘루마는 거짓선지자로서 복음을 막는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뜬 바울과는 달리, 오히려 영원히 볼 수 없는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방해하고 주의 종을 핍박하는 자는 주님의 손으로 직접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는 둘째사망을 만나기 때문에, 여러분은 꿈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성도를 핍박하거나 교회를 방해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바울이 세상에서 살 때는 자기의 신앙과 판단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을 징계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보면서, 어둠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기쁘게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도 삶속에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 사랑을 되돌려 드리는 믿음으로 충성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한결같은 사랑으로 보호하시는 주님을 위해서 사도 바울처럼 끝까지 달리는 믿음을 소유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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