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만 사는 나라 · 조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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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예수그리스도

요한복음 12장 9~16절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2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렸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와 성장한 후에 부모를 바라보는 마음이 다릅니다. 이처럼, 신앙이 성장할수록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야만 모두가 살 수 있는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서면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음을 알면서도 스스로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죄를 대속하시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자기의 의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겸손한 자리에 내려가 본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던 고백을 생각해보면 그가 죄를 이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고 바울의 겸손한 믿음을 인정했습니다. 천국에 다녀오는 경험과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날마다 정직한 믿음을 위해서 낮아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으로 따라가는 겸손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예루살렘에 함께 들어가자고 청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하겠습니까? 네가 가장 아끼는 세상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깔고, 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십자가를 지자고 한다면 세상의 겉옷 벗기가 두려워서 주저하지는 않겠습니까? 쟁기를 잡은 자는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며 십자가 앞으로 가자고 하는데 뒷걸음 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신앙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조차 망설이는 불신앙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더는 너를 위해서 기적을 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처럼 도망치고 있지는 않는지 여러분의 신앙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유월절이 지나면 더 이상 문설주에 바를 어린양의 피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 13절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강한 힘을 가진 메시야가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선민이고, 이미 율법을 통해 구원이 주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그토록 말씀을 전했지만, 그들은 오직 세상의 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다윗처럼 막강한 힘을 가진 왕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한 것입니다. 이들은 인간적인 욕심으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 마음을 모아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일 뿐, 죄에서 해방시켜 주실 예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세상의 힘을 하나도 주지 않을 것인데 그래도 나를 끝까지 믿어주겠느냐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만 섬기겠다는 고백을 드리며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타고 계신 나귀 위에 제자들은 겉옷을 깔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군중들 역시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아드리며 오직 예수님만 섬기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겉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고백입니다. 지금 제자들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이런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른 채 호산나를 부르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환호하는지 또 자기들의 마음이 왜 이렇게 들뜨고 기쁜지 그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훗날 유월절 어린양인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는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예수님께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시면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욕심 때문에 열렬히 환영했다는 것을 부활하신 후에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삼 년 동안 예수님께 말씀을 들었지만, 진리를 통해 세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예수님을 배신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자신들의 감정에 속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눈먼 자와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양식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왕이 되면 자신들도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기쁨으로 들떠 있었던 것입니다. 권세를 얻어 잘 살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무리 가운데 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럽고 흥분되며 감격스러웠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부르는 호산나 찬양은 전율을 느낄 정도로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자신감과 확신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죽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런 마음은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한 감정에 속은 것이기 때문에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은 로마에 대항하는 의미이므로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담대해지고 두려움이 사라지는데, 이것이 바로 지혜가 없는 인간들의 심리입니다. 사람들은 큰 조직에 있으면 내가 하는 일이 없어도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정말 많은 것이 힘이 된다면 예수님께서 결코 열두 명의 제자만 데리고 다니며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수나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믿음과 지혜와 능력을 판단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욕심과 인간의 의를 더 많이 버리느냐 하는 것으로 가늠하는 나라이고, 누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했느냐 하는 것으로 구원과 상급을 받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권세와 물질을 많이 가졌다고 해도 그것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세상의 소유로는 하나님의 기업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재물이 많은 사람도 그가 세상의 쾌락에 취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조차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열렬하게 환영하는 사람들의 소원대로, 재물과 권력과 건강을 주셨다면 그들은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버리면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살고 자신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막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인생들의 판단이고 결정이며, 이렇게 어리석은 자들이 지금 저와 여러분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고 명철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인간의 의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구원 사역에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혜가 모자라도 인내하며 진실하고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명을 맡겨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높여주면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세상의 꾀가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순종만 하면 소원하지 않아도, 매달리지 않아도 창조 주 이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하여, 그 악행이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세상의 재판장이 교회의 문제를 심판하고 판결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고 판단하고 다스려야 하는 교회가 도리어 세상의 심판과 조롱을 받으며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 다스리는 곳입니다. 그런 교회가 세상처럼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탐하고, 성적으로 타락했으므로 스스로 빛을 버리고 어둠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어두운 세상이 빛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해 주셨는데도 빛을 든 성도들이 스스로 빛을 꺼버리고 만 것입니다. 영적으로 올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목회자와 성도들이 반목하고 있는 것이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세상의 힘과 권력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니까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소유를 위해서 겉옷을 펴 드리지 말고 고난에 동참하는 심정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계시는데, 그 죽음 위에 세상을 위해서 겉옷을 깔고 호산나를 부르며 종려 가지를 흔든다면 그 모습을 보고 계신 하나님은 진노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드린 찬양은 무엇을 얻기 위한 찬양입니까? 십자가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다 알고 있는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는 무엇을 위한 기도입니까? 여러분이 드린 찬양과 기도가 정직한 마음으로 드린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해 주신 말씀을 모두 잊어버리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호산나를 부르며 당장 왕의 옆자리에 앉을 것처럼 우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회개를 가르쳤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지만 그들은 말씀이 영생을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배워도 말씀이 삶과 하나가 되지 못하면 그저 말씀은 말씀대로 있고, 삶은 세상 사람처럼 사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운 말씀은 고난을 통과했을 때 살아났는데, 말씀이 운동력이 있고 날 선 검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뒤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자 제자들과 백성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기적이 일어나야 하고, 괴롭히던 로마인이 물러가야 하는데 예수님은 기적은 커녕 죽을 준비를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현실이 되었고, 가룟 유다와 무리들은 검과 몽치를 들고 범죄자를 잡는 것처럼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을 환호했던 무리들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자신들도 어떤 결정이든 해야 했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호할 때는 그 무리가 자기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는 무리들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주님을 버리는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자기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움직이는 곳입니다.

누가복음 22장 61절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이켜서 자기를 보실 때 그제야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전전긍긍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과 마주치자 그제야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닭이 큰 소리로 울자 베드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죽을지언정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나는 예수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있을 때 베드로와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고 있는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베드로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또 그토록 사랑하던 제자가 살고 싶어서, 자신을 정말 모른다고 저주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메시야라면 그런 자를 위해서 죽고 싶겠습니까?

우리는 이번 일만 해결해 주시면 앞으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거짓약속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매번 속아 주시며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속였다고 신이 나서 세상으로 뛰어 가고 있는데, 그런 나를 위해서 가시관을 쓰고 계신 예수님의 눈과 마주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면서도 속아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눈을 보면서 도망쳐야 했던 자신이 싫어서 베드로는 통곡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은 사랑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놓지 못하는 자신이 싫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오신 것은 바로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욕심이 앞을 가렸을 때는 그토록 믿어지지 않았던 말씀이 배신했을 때, 핍박을 받았을 때, 주님 없이 혼자 있을 때, 승천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깊은 깨달음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배워도 삶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를 열렬히 환영했던 제자들과 백성들이 한 순간에 배신하는 것을 보면서 너는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는 너희들이 배신할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니 너희들은 세상을 위해서 나를 이용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어떤 대답을 하겠습니까?

만약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 역시 베드로처럼 죽음이 두려워서 배신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책망을 듣더라도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말라고 말리고 싶습니다. 호산나를 부르며 찬양하는 무리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나귀 앞에 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지 못하도록 무릎을 꿇고 막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모진 매를 맞고 피를 흘리며 가시관을 쓰고 생명을 주신다고 해도 저라는 인간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주님께서 대신 죽기에는 너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내가 가는 이 길만 잘 따라오면 너도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 영광을 받는다는 말이 좋아서 고개를 끄덕이지만, 십자가를 같이 지자고 하시면 도망갈 것이 분명합니다. 피 흘리시는 예수님보다 힘을 가진 세상이 나를 살려줄 것 같고, 영적 고난보다 세상이 더 편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고개를 떨구는 예수님을 당장이라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저라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저를 위해서 죽어 달라는 것이 어떻게 말이 되겠습니까? 호산나 부르며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 같지만 재산을 빼앗으면 배신할 것이고, 건강이 약해지면 돌아설 것이므로, 늘 예수님을 속이는 가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죽지 말라고 말릴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너희들이 내가 가는 길을 막을지라도, 너희들이 나를 버린다고 해도 나는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으러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배신하는 우리를 향해 그곳은 어둡고 악이 도사리고 있으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돌아와서 빛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죽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인간의 의와 교만이 깨어지고 나자, 자기가 얼마나 작고 별 볼일 없는 인간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가 자신이고, 죄인 중에 괴수가 바로 자기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사도 바울은 모자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버리고 나자, 자기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더럽고 초라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죄송한 마음으로 용서해 달라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보는 자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용서를 받은 자만이 거듭난 성도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마음을 가리면 지금 호산나를 부르는 것이 얼마나 악한 죄인지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향해 왕이라고 외치는 그 음성이 얼마나 간사한 것인지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아는 체하면 하나뿐인 생명을 잃을 수 있기에 십자가 앞으로 나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겉옷을 깔아드리던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환호했던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두고 지금 모두 어디에 숨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과 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재물과 문제의 해결과 권세와 명예를 달라고 찬양하고 예배하던 저와 여러분은 왜 십자가 곁에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물과 피를 다 쏟고 계시면서도, 우리를 바라보며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죽어야만 너희가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왜 그 눈을 피해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의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환영할 수밖에 없고, 인간의 의를 버리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결국 예수님의 눈을 보면서도 배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귀신을 내어 쫓았고, 구제도 했으며, 병자를 치료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에 매이자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났다면, 세상의 자리에서 믿음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하고, 불순종의 자리에서 순종의 자리로 옮겨야 하며, 불평과 불만의 자리에서 감사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순교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나를 잡았으니 저들을 모두 살려달라고 간청하던 예수님의 사랑을 버린 자들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한 명도 증인으로 서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배신하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지켜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영혼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셨던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보고 탄식하지 않도록 거듭나야 합니다.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예수님께 부끄럽지 않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드리면 여러분도 믿음의 향유를 부어드리고,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를 만나면 억지로라도 같이 십자가를 지기 바랍니다. 앞선 믿음의 형제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무조건 따라하다 보면, 여러분도 믿음의 길에 서 있는 성숙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과 마음과 뜻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기 바랍니다.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 깊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고 싶다면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능력이라는 것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 보기 바랍니다.

저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지금 어떤 것에 관심을 갖고 일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합니다. 썩고 냄새 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입으로만 믿는 신앙은 거짓입니다. 세상이 핍박하면 절충하고 숨어버리는 신앙은 거짓입니다. 이제는 결단해야 하는 때가 여러분 곁에 바짝 다가와 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을 드리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 여러분의 생명입니다.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을 본받아 언제나 하나님께 충성하는 진실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죽어야만 사는 나라 · 예수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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