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한 마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산상수훈을 듣고 있으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 천국을 소망하는 정직한 신앙을 위해서 정말 마음에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에게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주라고 명령하시자 부자는 그 말씀대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구속의 역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두려워했던 베드로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원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의 의지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 32장 15절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광야와 같이 삭막한 우리 마음이 아름다운 밭이 되고 울창한 숲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강퍅해진 우리의 심령에 성령께서 임하시면 물 댄 동산과 같이 생명이 싹이 트는 아름다운 생명의 물줄기가 흐를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진리의 거룩함을 알게 되고 죄가 얼마나 추악한지 깨달아 자신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사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말씀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이 성령께 의지한다면 겸손한 믿음으로 순종하는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애통은 슬퍼하고 가슴이 아프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잃었을 때 고통스러워 합니다. 세상에서 받는 애통한 마음은 세상의 것으로 치유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인해 받은 고통은 사람으로 치유할 수 있고 물질로 인해 받은 고통은 물질이 채워지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애통은 세상의 문제들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향한 영적인 아픔을 말합니다. 성도들이 받는 애통은 선한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데 이 위로는 세상적인 위로와 달리 영혼에 채워지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 눈물로 기도하고 헌신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성도는 그 은혜를 영적으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거대한 문제 앞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할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애통해 할 때 거대한 성과 같은 큰 손이 어루만져 주시며 근심하지 말고 아파하지 말라는 따뜻한 음성이 감싸주시는 것 같습니다. 위로를 받은 성도는 사람들의 핍박으로 인해 받는 죽음이 두렵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으로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이런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목숨을 다해 말씀을 전했지만 전혀 듣지 않는 백성들을 보면서 눈물로 기도하며 애통해 했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2장 10~11절
10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11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요시야 왕부터 시작해서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까지 약 40년간 사역을 하였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정세는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의 세력이 점점 약해져 가는 시기였고 바벨론이 서서히 힘을 갖는 시기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애굽을 버리고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요시야 왕이 죽자 아들 여호아하스는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선한 정책을 버리고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 여호아하스왕은 즉위한지 3개월만에 애굽의 바로왕 느고에게 포로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여호야김과 여호야긴과 시드기야 왕 역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고 시드기야 11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예레미야의 예언이 모두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우상숭배와 거짓 예언과 열방을 의지하는 것과 공의를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죄이므로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지만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메시지를 적어서 유다 민족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지만 여호야김 왕은 예언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의 1차 침략으로 폐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왕에게 바벨론에 항복해야만 살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 주셨으므로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전했지만 끝까지 바벨론에 대항하다가 두 눈이 뽑힌 채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유다 왕들도 다 죽고 그다랴 총독까지 살해를 당하자 요하난이 유다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유다에 남은 백성과 예레미야를 이끌고 애굽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했지만 심한 핍박을 받다가 결국 애굽에서 순교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예레미야는 불행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만들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 열방을 더 의지하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던 예레미야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인이며 모든 인생을 주관하시고 내세까지 주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만왕의 왕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심판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느부갓네살을 바벨론에서 데려다가 유다를 치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을 도와 주실 때, 심판하실 때 나라와 사람과 세상의 힘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랑과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처럼 일상의 일들을 모두 끊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이들은 설마 하며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으며 홍수로 다 멸망 당하는 그 순간까지 돌이키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면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세상의 삶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예레미야 25장 11절의 말씀처럼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70년동안 종살이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설마 하는 생각과 당장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과 자신의 삶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과 간이 땅에 쏟아지는 고통을 느끼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했지만 사람들이 그 말씀을 저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잔인한 바벨론에게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도 말을 듣지 않는 자녀나 말씀을 듣고도 지혜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을 한번쯤은 가졌을 것입니다. 성령과 동행하면 환하게 보이는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을 어리석은 자신의 욕심과 아집과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두 눈과 두 귀를 막고 오직 자신의 마음의 소리만 듣는 그들이 마지막에 만나는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에 막아보려고 해도 절대로 듣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꼭 고난을 당해야만 그제야 후회합니다. 유다 백성이 앞으로 당할 엄청난 고통을 알기에 바벨론에 굴복하도록 전했지만 눈과 귀를 닫은 그들은 도리어 예레미야를 핍박했습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심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들을 살려야 했기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애통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할 때 들어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아무리 짐승처럼 잔인한 바벨론이 쳐 들어온다고 해도 너희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는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야 살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세상의 삶도 중요하겠지만 내가 지켜주지 않는다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너희의 삶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성도들을 보시며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위험한 곳이라고 탄식하시는 성령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때까지 너희들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보다 자신의 삶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할 뿐 아니라 엄청난 심판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3~35절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신약에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장면이 몇 번 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은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울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보시며 나사로를 찾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이틀이나 더 머물다가 나사로가 죽은 후에 유대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렸던 마르다는 예수님이 이곳에 계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을 했습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곧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지만 마르다의 신앙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마르다는 지식적인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마르다와 동일한 고백을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구체성이 없이 사실이나 현실에서 떨어져 있는 신앙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네가 믿고 있느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내가 나사로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느냐는 말씀입니다. 나는 창조주이며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에 나사로를 다시 살릴 수 있는데 정말 네가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느냐고 물어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관념적인 신앙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 현재 일어날 수 있는 사실적인 신앙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언젠가는 응답하시겠지 이렇게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경험을 필요로 하는 신앙입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요한복음 11장 27절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마리아를 불러 오라는 것을 보면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그의 행동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마르다의 대답을 들어보면 그리스도가 무슨 뜻인지 또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보좌에 앉으신 전지전능하신 만 왕의 왕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절대로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면 간곡하게 간구했어야 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고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을 믿고 있으며 마지막 날 부활할 것도 믿지만 지금은 오빠 나사로를 살려 달라고 간구 했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는 것으로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이곳에 오셨기 때문에 마르다가 믿음의 고백만 잘 했다면 쉽게 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앵무새처럼 머리로만 알고 있는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진실하지 않은 기도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고 응답 받을 수 없으며 머리로만 아는 신앙은 힘이 없습니다.
마르다의 부름을 받고 뛰어온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배웠으며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지만 자기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문제를 만나자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음식을 대접했고 말씀을 한 마디라도 놓칠까 봐 말씀에 집중했던 사람들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소경을 치료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을 때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 때는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서 왜 결단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이 막상 자신의 문제가 되자 자기에게 실제로 기적이 일어날까 하는 의심이 있어서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일 때는 복음을 자신 있게 전할 수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문제가 되자 세상을 초월한 믿음을 보여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조금 더 빨리 오셨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 이제 오셨느냐는 불평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일이 일어난 것은 전부 예수님께서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생각이 있다면 불평할 것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려야 정상적인 신앙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은 나사로를 살릴 능력을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기도하면 응답하는데 왜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느냐고 책망하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그리스도이고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은 천국 갈 때나 필요한 것이고 지금 당장 나에게 일어난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도 해결할 수 없다고 낙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도와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원망하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왜 하필 내 몸이 아프며 내 가족이어야 하느냐고 원망한다면 지금 회개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런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보며 애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끝까지 믿어드리지 못한 자신의 죄를 보며 애통하는 믿음이 있어야만 다른 사람들의 불신앙이 안타까워서 애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우리에게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해서 네가 주인이 되어 나를 두번째 자리에 두었느냐고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그들의 불신앙을 보신 예수님은 너희들이 머리로만 알고 있는 내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보여 주겠다고 다짐하신 것처럼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시니까 나사로는 기다린 것처럼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는데 예수님께서 그를 풀어서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나사로를 살리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진실한 믿음을 보여드렸다면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통해 두 여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더 많은 일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믿음으로 응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들과 함께 계시며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 알고 계신 성령께서는 영혼구원을 위해서 애통하며 간구하는 성도에게 큰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은혜와 위로를 받은 자녀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가 믿음의 반석위에 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믿음으로 애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선한 행위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위로는 곁으로 와서 부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썩어가는 세상을 보며 마음이 힘들고 아파할 때 가까이 오셔서 안아 주시며 내가 다 알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동행했던 시므온은 예수님을 의롭고 경건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곁으로 오셔서 위로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죽도록 헌신하는 성도들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고 나면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보혜사는 위로자라는 뜻을 가지고 계신 성령이며 성령께서는 성도들과 함께 동행하시며 죄를 회개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심령에 위로자가 되시는 예수님과 성령께서는 큰 능력과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영혼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 받는 형제와 이웃들을 보면서 큰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얼마나 따뜻하고 큰 힘이 되는지 은혜를 받아보신 여러분은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받는 위로는 극히 부분적일 수밖에 없지만 인생의 종말이든 세상의 종말이든 마지막 날에 천국에서 받는 완전한 위로는 영원토록 지속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영혼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애통하는 자로 살았는지 아니면 다른 영혼들을 아프게 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며 살았는지 극명하게 밝혀집니다.
지금 여러분이 평안하게 사는 것은 아마도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애통하며 기도하는 믿음의 형제들의 응답일 것입니다. 그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진심으로 영혼구원을 위해서 애통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애통하는 성도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선한 믿음을 드러내는 그 성도의 헌신을 아시기에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한 분인지 알고 있으니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헌신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