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6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7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8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9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10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11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12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13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요즘 사람들은 자신만 위해서 사는 것을 지혜로운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선한 관계라 할지라도 이용하려고 합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과 목적만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남들을 전혀 배려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타인의 의견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의견만 고집하므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없으며 결국 성숙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두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부르짖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참 행복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과거보다 훨씬 자유로워졌는데, 왜 사람들은 외로움을 토로하고 속마음을 전할 상대가 없을까요? 삶은 훨씬 부유해졌는데 마음은 피폐해졌고,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희생할 때 참 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상대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에게 소중한 것을 나눌 때 자존감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본인도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을 하면, 따라가지 않아도 사랑과 행복이 먼저 찾아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처럼 자신만을 위한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조금 양보하기도 하고, 양보하는 가운데 희생을 감당하기도 하며, 희생하는 관계를 통해 사랑을 깨닫는 고귀한 마음을 알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끊임없이 관계를 해칠 것입니다.
아담의 뼈로 만들어진 하와는 아담을 돕는 아내입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았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돕는 아내를 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의 뜻대로 아담을 도운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의 지배를 받아 아담을 어둠으로 이끌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죄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선한 믿음으로 돕는 관계였다면, 하와는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인 결과, 두 사람은 비참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고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상대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말씀으로 바로 서는 것이 바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자유와 행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고, 그 인간적인 자유로움과 풍요로움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공중 권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야만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지 않지만, 사탄은 처음에는 자유를 주는 것처럼 도와주다가 결국 죄의 끈으로 묶어 버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셨고 사사를 세워 주시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삶을 위해서만 하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부르짖으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방 나라로부터 공격을 당할 때마다 부르짖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들이 원하는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면 다시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사사기가 끝날 때까지 이런 악행은 반복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사 시대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까지 응답과 심판을 반복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9장 6절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배신한 그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은 마지막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사사로서 미디안을 물리쳤던 그의 충성을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순간이든 평생이든 하나님께서는 그 헌신을 잊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신앙이 날마다 충만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진심으로 충성하던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충성했던 믿음을 기억하고 계시며, 그 충성에 대한 상급을 분명히 주고 계십니다. 만약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 뿐 아니라 평생 배신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면 더 큰 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가 죽고 난 후에도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복수를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생각에는 기드온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아비멜렉이 왕이 된다면 자기들에게 큰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이고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모습입니다. 또한 아비멜렉처럼 내가 왕이 된다면 훨씬 잘 할 수 있다는 생각과, 세겜 사람들처럼 내 혈육이 한다면 내가 더 열심히 충성하겠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계획을 대적하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내가 어떻게 도울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올바른 영적인 판단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면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세겜 사람들은 혈육인 아비멜렉이 왕이 되면 자신들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악행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기드온의 헌신을 기억하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죄를 책망하셨고 모두 심판하셨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사망을 낳고 만 것입니다.
기드온이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끝까지 살아드리지 못한 부분은 하나님과 기드온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판단하고 조롱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기드온은 자신들에게 해를 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성도들이 목회자를 판단하고 대적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가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라면,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이라면 성도들이 그를 판단하고 대적하면 하나님께 도리어 책망을 받습니다. 진리를 연구하고 전하는 목회자를 괴롭히는 것은 곧 진리를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회자가 진리를 전하지 않고 본이 되는 삶을 살지 않으며, 성도들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성도들보다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도리어 성도들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처럼 말씀을 알고 있어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어려울 때 기드온을 세우셨는데, 그는 의심하고 주저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목숨을 걸고 전쟁을 했으며 이스라엘을 해방시켰습니다. 기드온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책망하실 부분입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기드온에게 무엇을 받았는지 그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연단을 받으며 고통을 당했던 자기들에게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기드온과 기드온의 집을 공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집을 배반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모두 망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만 아는 사람들의 삶과 결말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책망을 받지 않으려거든 목회자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도 판단하고 원망하고 싶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보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손해를 끼치고 있는지, 지금 여러분이 원망하는 그 부분을 통해서 그가 취할 이득이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손해를 끼친 적도 없고 취할 이득이 없다면 그 원망하는 마음을 접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좋지 않은 인격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못한 잘못된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버지의 사랑을 잊었고, 왕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죄를 짓고 만 것입니다.
사사기 10장 1절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1절에 보면 아비멜렉 후에 잇사갈 사람 돌라가 사사가 되어 22년 동안 이스라엘을 별 문제 없이 다스렸습니다. 돌라가 어떤 연유로 사사가 되었는지 기록은 없지만, 그가 22년 동안 다스리면서 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들을 소개할 때 보통 사건을 위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성경을 볼 때, 사사가 되었지만 큰 사건이 없이 사명을 끝까지 감당한 돌라와 같은 사람에게 더 관심을 보입니다. 2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사사의 직분을 감당했으면서도 아무 문제가 없이 사명을 감당한 이런 사람의 신앙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미가야나 스데반, 그리고 가룟 유다 대신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맛디아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자신을 굳이 드러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께 신앙을 인정받는 이런 성도들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선한 말씀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돌라 이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22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에게 아들 30명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 30명은 모두 어린 나귀를 탔으며, 성읍 삼십을 가졌다고 성경은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어린 나귀를 탔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는 것이며, 성읍 삼십을 가졌다는 것은 야일의 자녀들이 부족할 것이 없는 부를 누리며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 사실을 굳이 기록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아들이 30명이라는 것은 아내가 많았다는 뜻이며, 아들 뿐 아니라 딸들도 많았을 것이므로, 그는 사사의 사명보다는 자신의 삶에 더 애착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야일의 이런 삶은 백성들로 하여금 기복신앙을 갖게 하는 잘못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야일과 그 자녀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혹은 직분을 받으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는 잘못된 신앙관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잇사갈 사람 돌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처럼 에봇을 만들지도 않았고 야일처럼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백성을 다스렸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돌라를 사랑하셨기에 백성들이 평안과 안식을 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 기록할 만한 큰 사건이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사사인 돌라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신앙을 보면서 그들도 하나님을 섬겼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백성들의 관계를 화평하게 하는 사사 돌라를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교회에서 문제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직분을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의 존경을 받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교만한 말과 행동을 하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를 기억하시며, 그에게 상급을 주시기 위해서 준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돌라의 시대에는 열방의 공격이 없었고, 백성들이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으므로 기록할 만한 큰 사건이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볼 때 이삭처럼 큰 사건 없이 평화로운 삶을 산 사람들은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서 돌라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제가 추리해서 전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돌라와 야일이 사사의 사명을 감당할 때, 백성들은 어떤 사람에게 더 주목했을 것 같습니까? 자신의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한 돌라를 더 섬기며 그의 신앙을 따라하고 싶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백성들은 감히 탈 수도 가질 수도 없는 나귀를 아들들 30명에게 주고 성읍 삼십을 다스리게 한 야일에게 관심을 가졌을 것 같습니까?
단언컨대, 백성들은 돌라보다는 야일처럼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야일이 죽고 난 후에 한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돌라가 죽고 난 후 평화로운 가운데 야일이 사사로 세워졌을 때 백성들은 돌라를 본받아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어떤 동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야일이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은 다시 악한 죄를 지었습니다. 야일이 살면서 누린 부를 보았고, 그의 삶을 부러워했던 백성들이 야일이 죽자 자신들의 욕망을 분출한 것입니다.
사사기 10장 6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은 잘 살기 위해서 바알과 아스다롯뿐 아니라 각 나라의 신들을 모두 숭배한 것을 보면 그들이 야일처럼 잘 살기 위해서 몸부림 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 살 수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지도자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야일의 이름은 ‘비추는 자’, ‘깨우치는 자’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는 백성들에게 무엇을 비추었으며 무엇을 깨우치도록 도왔습니까? 그는 백성들이 평안과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에 눈을 돌리는 죄를 심어준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더 많은 사명을 맡기시는 의미로 재물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그 간증이 자신의 불신앙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은 정해진 시간이 있으며 사후에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을 망각하면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재물이 많은 것이 죄가 아니라 재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사후에 갈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기 때문에 눈에 보이고 욕심을 채우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죄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 암몬에게서 보호하시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납달리, 아셀, 스불론, 잇사갈, 므낫세 지파가 블레셋과 암몬 같은 팔레스틴 남방 지역의 민족들에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암몬이 요단을 건너 유다와 베냐민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까지 정복한 것입니다.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으로 분산시켰고 혹독한 압제를 가했습니다. 평화로웠던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으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은 사람의 힘으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자 자신들이 버린 하나님을 찾았고, 바알을 섬기는 죄를 지었다며 회개하였습니다.
사사기 10장 11절, 13절
11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13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정말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신 사건을 말씀하셔야 했고,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살았다면 이런 말씀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었고, 출애굽 노정에서 아모리에게서 건져주었으며, 모압 왕 에글론과 동맹했던 암몬 자손에게서 구원해 주셨고, 삼갈을 세워 블레셋사람 600명을 죽였던 사건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의 압제에서 건져주었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다시는 이스라엘 구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크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택한 너희들의 신들을 찾아가서 구해 달라고 간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마다, 문제마다 응답해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선택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빌고 빌었던 그 우상들은 모두 헛것이며, 그 우상이 너희들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끊임없이 우상에게 빌었으며, 그런 행동이 하나님을 아프게 해 드린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편 96편 4~7절
4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5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6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7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감히 인간이 상대할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만든 우상들과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상은 헛것이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 전능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와 성도들은 늘 충만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에 따라 버릴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욕심에 따라 하나님을 버리기도 하고 섬기기도 하는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행동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리에 있는지,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전 1500년부터 주후 100년에 이르기까지 약 1600년 이라는 긴 시간 동안 40여 명의 거룩한 사람들이 기록한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주시는 영감으로 기록한 것이며 성경은 그대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죄에 빠지는 것처럼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교훈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자신의 죄를 볼 수 없으며 진리의 길로 가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죄를 범한 것처럼 우리도 성경 말씀을 알지 못한다면, 인간적인 의를 위해서 교만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세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성경을 배우고도 변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어떤 학문으로도 그를 깨닫게 할 수 없으며 선한 삶을 살도록 도와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보시며 안타깝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죽어주었고, 내가 너를 높이기 위해서 낮은 자리로 내려왔으며, 내가 너를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부끄러운 자리에서 못 박혔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버린다면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길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하늘이 기뻐하고 땅이 즐거워할 때 함께 찬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절대로 죄를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40년 동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한 기드온이 잠깐 드렸던 헌신도 잊지 않고 상급을 주신 하나님인데,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는 여러분의 충성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고 욕심내지 말고 자신의 의를 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선한 성도 희생하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