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삯은 사망이라 — 사무엘하 · 조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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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인간의 끝없는 욕심

사무엘하 20장 14-22절

14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그를 따르더라 15이에 그들이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한 지역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 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16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17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이르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하니 대답하되 그러하다 하니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하니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하니라 18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19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 20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21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던지리이다 하고 22이에 여인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매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나아가니라

하나님께서는 압살롬과 바르실래의 사건을 통해 사람들의 악함과 선함을 드러내시며 성도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다윗을 통해 선한 역사하고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욕심을 위해서 쉴 새 없이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회개를 올바르게 하는 것도 말씀을 알아야만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을 쫓기 때문에 끝없이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과의 전쟁을 끝내고 궁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고난을 당할 때는 돕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 압살롬을 이기고 궁으로 돌아온다고 하자 서로 다윗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먼저 요단을 건너서 다윗을 만나자 자신들이 받을 상급을 가로챘다고 분노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다윗에게 사죄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면 누가 먼저 다윗을 만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이나 유다 사람들은 자신을 배신한 원수일 뿐인데 그들은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를 놓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고난을 당할 때 돕지 않던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다툰다는 것은 부끄러운 행동입니다. 다윗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면 누가 먼저 다윗을 배웅했고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 다툴 것이 아니라 잠잠히 나라와 다윗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옳은 태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버리고 권력을 잡은 것 같은 압살롬을 지지했던 사람들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그들은 다윗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인지 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전체를 보지 못하는 이들은 이권다툼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면 욕심을 갖게 되고 어떤 것이 거룩한 일인지 판단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신 큰 그림을 보지 못합니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봐야 하는 것처럼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본다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지막 날을 향해 달리고 있는 세상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때를 위해서 준비할 수 있습니다.

큰 고난을 겪고 입성하는 다윗 곁에는 불평하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함께 있는 것처럼 천국으로 가는 길에는 순종하는 성도와 불순종하는 성도가 함께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앞선 자들이 믿음의 본을 보여도 본인이 거듭나지 않으면 세상과 교회를 넘나드는 쭉정이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입김 한번이면 날아가 버릴 쭉정이는 알곡과 마지막 날까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쭉정이는 뜨거운 태양과 탈곡의 고난과 알곡을 골라내는 주인의 매서운 눈까지 알곡과 같은 자리에서 긴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버려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알곡입니까? 아니면 쭉정이 입니까? 함께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고 헌신했는데 하나님께서 쭉정이라고 버리신다면 그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고 안타깝지 않습니까? 물론 그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시겠지만 자신이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본인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꽉 찬 알곡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부터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회개하며 알곡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세베대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시는 줄 알고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이 여인의 부탁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여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에게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들은 마실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얼마나 좁고 험한 길을 가겠다고 대답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던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듣고 배워도 알곡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감당하지 못할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이셨지만 이들은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시는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시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섬겨야 하며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드리는 희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베대의 아내는 아들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 출세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자기 아들들이 고난의 잔을 마신다는 뜻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지금 야고보와 요한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출세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것처럼 다윗은 자신을 배신했던 유다족속을 용서하고 함께 요단을 건넜습니다. 유다는 다윗이 자신들을 용서했다는 것을 알고 감사했지만 더 큰 상급을 원했던 이스라엘은 다윗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을 만나고도 스스로 그 기회를 버리고 맙니다.

이스라엘이 아무 잘못도 없는 다윗에게 불평하기 시작하자 사탄은 그 자리에 있던 불량배 세바를 악의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잠시 방심하면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때 세바라는 사람이 나타나 나팔을 불며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다고 선동하자 이스라엘은 다윗을 버리고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세바의 말을 따르는 것은 곧 하나님과 다윗을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끝까지 다윗을 배신하지 않고 동행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과 유다는 똑같이 용서를 받았지만 한 쪽은 배신을 택했고 한 쪽은 섬김을 택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가는 길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유다처럼 하나님을 배신도 했고 또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용서받은 자의 자세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세바처럼 악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확고한 신앙을 갖지 않는다면 세바의 말에 속아 진리를 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유다 지파처럼 한번 정한 마음을 끝까지 지키기 바랍니다. 불평하는 이스라엘처럼 감사하는 마음을 잃게 된다면 결국 다윗의 적이 되어 심판 받은 세바의 동역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나님께 신뢰받는 다윗을 따랐다면 그들은 원하는 상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세바의 반란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세바와 전쟁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해야 하므로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군대 장관으로 세운 아마사에게 세바를 잡으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아마사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요압의 동생 아비새에게 세바가 성읍으로 들어와 숨기 전에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윗이 세바를 잡는 중요한 일을 요압에게 명령하지 않은 것을 보면 요압은 공을 세울수록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요압이 진심으로 하나님과 다윗에게 충성했다면 그로 하여금 나라를 지키게 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다윗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데도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는 요압을 보면서 영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20장 10절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을새

다윗이 아마사 대신 아비새에게 세바를 잡으라고 명령했지만 요압은 다윗의 뜻을 거스리고 아비새와 함께 세바를 잡으러 갔습니다. 요압은 어쩌면 아마사를 죽이는 것이 자신의 출세를 막는 모든 걸림돌을 치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과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자기 대신 군대 장관이 된 아마사를 죽이는 것쯤 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윗이 두렵지 않기 때문에 이런 악한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행동이 죄를 쌓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압을 의심하지 않았던 아마사는 그를 반갑게 맞았고 아마사에게 다가간 요압은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또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사무엘하 20장 23절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지휘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고

요압은 왕이 세운 아마사를 제거한 후 군대장관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다윗은 왜 자신의 명령을 몇 번이나 거역한 요압을 군대장관으로 세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요압과 함께 우리아를 죽이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요압에게 끌려 다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강한 힘을 가진 왕입니다. 그렇다면 요압이 왕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생명을 함부로 죽인 죄를 물어 요압을 제거해도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번번이 그를 군대장관으로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깊이 있는 다윗의 믿음과 지혜와 인내 때문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능력과 필요에 따라 적재적소에 사람을 세우는 지혜를 가져야 하며 그들을 통솔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다윗은 요압을 통제할 능력이 있었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하나로 묶고 바로 세워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요압의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를 당장 쳐내고 싶었겠지만 나라의 안정이 먼저이기에 참았을 것입니다. 요압의 악행을 몰라서 세운 것이 아니라 다윗이 그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를 세워도 다윗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그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요압의 재능과 능력을 사용한 것뿐입니다. 물론 다윗에게 이용을 당한 요압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분한 마음을 가졌겠지만 죽도록 나라와 다윗을 위해서 일하고도 선하게 변하지 않은 요압은 다윗의 믿음의 형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악한 요압을 다시 군대장관으로 세우고 나라를 위해서 전쟁터로 내 보내는 것은 다윗이 미련한 것이 아니라 강하고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직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을 올바로 구분하지 못하면 알곡이 될 수도 있고 쭉정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같이 선하다면 알곡일 것이고 요압처럼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결국 쭉정이가 될 것입니다.

요압은 군대 장관이라는 막중한 자리에서 하나님과 다윗을 배신하는 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큰 심판을 받았습니다. 다윗의 곁에서 선한 그의 삶을 보고도 그는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아주 큰 책임이 따릅니다.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집사를 받고도 초신자처럼 행동한다면 하나님께 받는 징계가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죄를 짓는 것과 알면서 짓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탄의 도구로 부르신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지만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지 않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지 않았기 때문에 특혜를 받고도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아무리 많이 배워도 그 말씀을 믿음의 행위로 드러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서 헌신할 때 그 믿음이 진심이면 행위는 선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 선한 믿음의 행위를 드러낸 성도는 연약한 성도들의 본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요압은 전쟁터에서 승리했지만 자신을 높이기 위한 교만을 가졌기 때문에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결국 솔로몬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악인은 하나님의 때에 직접 치리 하신다는 것을 믿고 분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장군들을 죽인 요압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도구로만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의 시야가 얼마나 넓은지 그리고 그의 믿음과 인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놀랍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도 배신하는 사람들을 바로 심판하시지 않고 그대로 두신 것은 누군가의 채찍으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악한 행동이 선한 성도들이 회개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가 될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두십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충성했고 헌신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채찍은 자녀들이 바로 서면 꺾어버리는 도구이므로 여러분은 남을 세우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사용 되고 버려지는 요압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냉철한 판단과 충만한 믿음으로 죽도록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람들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다윗이 되겠습니까? 다윗이 되기 위해서는 죽을 만큼 인내해야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요압은 자신이 지혜롭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윗이 절대로 자기를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다윗을 협박해도 늘 군대 장관으로 세우는 것은 자신이 뛰어난 용사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어떤 행동이라도 할 수 있었던 요압은 아마사를 죽였는데도 군대 장관이 된 것 같지만 이미 틀어진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솔로몬을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지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용서를 받았던 요압은 끝까지 다윗을 배신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끝까지 곁에 두셨던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까지 요압을 곁에 두었습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룟 유다를 배신하는 자로 택하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 자가 있다고 미리 예언하셨는데 가룟 유다가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아서 성경말씀대로 예수님을 파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자기의 판단이 옳다는 생각은 결국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영혼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방법을 그대로 교회에 적용하려고 하지만 세상과 교회는 목적지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세상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교회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꼭 명심하기 바랍니다.

요압은 다윗을 대적한 세바가 숨어있던 아벨 성을 에워싸고 성벽을 헐고 있을 때 그 성읍에 사는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을 불렀습니다. 성벽을 무너뜨리고 있는 요압에게 여인은 “이 아벨 성은 예부터 믿음으로 온전한 성읍이며 우리는 다윗에게 충성하고 있으며 축복받은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벨 성은 이름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성읍이었습니다. 이렇게 평화스러운 성읍에 세바가 숨어들었고 그를 잡기 위해서 요압이 무자비하게 아벨 성을 파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압은 세바를 잡기 위해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 아벨 성을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압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성을 무자비하게 무너뜨리자 지혜로운 여인은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바를 내어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여인은 지금 이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압이 원하는 것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요압은 목적을 위해서 무조건 성읍을 부수고 있지만 생명을 소중히 여긴 여인은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세바를 내어준 것입니다. 영적인 지혜가 있으면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세상의 힘과 지혜로 해결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벨 성을 무너뜨리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여인은 세바를 죽여 그의 머리를 요압에게 던지자 요압은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세바의 머리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압은 자신의 자랑인 전리품만 있으면 만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인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던 요압은 사람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지만 백성들의 생명과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여인의 지혜는 많은 생명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가정에 세바가 숨어 들어왔을 때 여러분은 말씀으로 빠르게 판단하여 그 죄를 쫓아내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내는 담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다윗처럼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악한 요압을 사용할 수 있는 뱀 같은 지혜와 용기와 인내를 갖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벨 성을 지켜낸 여인의 슬기를 배워서 비둘기처럼 선한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 알곡이라는 칭찬과 함께 영원한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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