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삯은 사망이라 — 사무엘하 · 조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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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요압의 배신

사무엘하 2장 12-23절

12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 기브온에 이르고 13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 기브온 못 가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앉으니 이는 못 이쪽이요 그는 못 저쪽이라 14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청년들에게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요압이 이르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15그들이 일어나 그 수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두 명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두 명이라 16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헬갓 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 17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18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 19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20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이르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나로라 21아브넬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가서 청년 하나를 붙잡아 그의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그의 뒤를 쫓으매 22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23그가 물러가기를 거절하매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의 배를 찌르니 창이 그의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이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

배신이라는 단어는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상대방을 전적으로 믿고 관계를 이어갈 때 상대방도 동일한 선상에서 의리를 지켜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믿고 아낌없이 마음을 주었는데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경우없이 행동하거나 은혜를 배신한다면 그 관계는 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서운한 감정과 배신에 의한 분노는 결국 인간의 이성에 의한 판단이기 때문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 관계가 얽혀있는 감정이므로 누가 옳고 그른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가까운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은 더욱 더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관계는 보편적인 것이 아닌 특정한 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람이 느끼는 모든 감정이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서운한 감정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한 것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판단의 기준이 자신이지만 하나님은 말씀이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법을 제시하셨고 법대로 살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의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법이며 그 법을 어기는 것은 곧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은 사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지켜내지 못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율 법을 완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구원은 율법을 지켜서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받는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베드로가 대답한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 것이므로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크게 칭찬하신 후에 이제 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죽임을 당하겠지만 제 삼 일에 살아날 것이라는 큰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진리를 깨닫게 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더 큰 비밀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죄를 대속하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면서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무척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는 말씀을 듣고 고난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자 삼 일만에 다시 산다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에 관심을 갖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막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성도들은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과 사탄이 위협하고 유혹해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만약 베드로가 지금까지 예수님께 배운 말씀을 이해했다면 죽임을 당한 후에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 들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 순간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고 예수님의 고난을 자기가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분노하고 흥분하면 진리를 알고 있어도 죄 된 말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숙하게 판단하는 훈련이 필요 합니다.

사람은 해도 되는 말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예수님께 사탄이라고 책망을 들은 베드로처럼 매 순간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판단을 하므로 결국 배신하게 됩니다. 자신이 사탄의 도구가 된 줄도 모르고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압인데 생명을 내어놓고 다윗을 섬긴 사람이 어떻게 다윗을 배신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으로 요압의 행동을 본다면 그가 변질되는 과정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요압은 스루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비새와 요압과 아사헬 삼형제는 전쟁에 나가면 매번 승리하는 큰 용사였기 때문에 다윗은 그 누구보다 조카인 이 세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부터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훗날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다고 했을 때 그런 선택은 하나님께 죄가 되는 일이라며 말린 것을 보면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 같습니다. 그토록 다윗이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말렸지만 다윗이 고집을 부리며 인구 조사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곧바로 순종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인구조사를 하는 신하의 충성심을 보인 것입니다.

요압은 자신의 판단보다는 다윗의 판단을 존중했습니다. 그는 다윗을 위하는 일이라면 적진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 들어서 다윗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는 훗날 다윗과 이스라엘이 크게 부흥할 수 있도록 에돔과 암몬과 수리아 외에 많은 나라를 점령하는 큰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다윗이 통일 왕국을 건국하는데 요압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충성하는 요압을 사랑하셔서 그가 전쟁에 나가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그의 생명을 보호하셨습니다. 요압을 돕는 것이 바로 다윗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요압에게 힘과 지혜를 주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충성했던 요압이 점점 변질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다윗이 왕이 되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는 생각을 갖게 되자 권력 또한 탐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존경하고 충성한 것도 사실이지만 인간의 의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배신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영육간의 성장을 했다는 생각을 하면 하나님과 다윗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존심과 고집과 아집을 갖게 됩니다. 처음에는 다윗의 말을 들었지만 자신의 판단이 생기는 순간 다윗을 판단하는 교만을 갖게 되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다윗과 다른 결정을 하는 것이 배신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신앙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요압이 변질된 것입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전쟁에서 승리 했으므로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교만한 생각 때문에 결국 순종을 버리고 배신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요압은 자존감이 높아지자 하나님이 두렵지 않았고 다윗의 의중을 전혀 살피지 않는 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만하게 되면 다윗이 가진 권위를 무시하게 되므로 동생의 복수를 위해 살인까지 하는 엄청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곁에 있으면서도 순간 잘못 판단해서 사탄의 도구가 된 것처럼 요압은 다윗이 순종하는 것을 곁에서 보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직접 보고도 하나님과 다윗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요압은 지금까지 진심으로 다윗과 백성을 사랑했고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도록 목숨을 바쳐서 충성했습니다. 그랬던 요압이 다윗을 버리고 악하게 변해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압처럼 자신이 헌신하고 헌금했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면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과 성장을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의를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충성할 수 있는 건강과 재물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헌신을 사용하셔서 일하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압이 없어도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수 있는 분이고 성도들의 충성이 없어도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요압의 충성이 더 빛이 난 것처럼 교회가 성장했기 때문에 성도들의 충성이 더 빛이 난 것입니다.

요압이 끝까지 겸손하게 다윗을 섬겼다면 하나님께서는 요압과 그의 자손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다윗과 이스라엘을 위해서 인생을 바쳐 헌신했지만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라는 말씀처럼 그의 말년은 아주 비참 했습니다. 교만은 자존적인 판단을 하게 하므로 인간의 의를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윗까지 버리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합니다.

요압은 영적으로 성숙한 판단을 할 수 없어도 다윗에게 순종했다면 하나님과 다윗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보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자 어둠에서 길을 잃고 악한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잊자 그는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권력은 자신이 준 것이며 왕의 자리는 자신이 만들어 주었다는 교만한 생각때문에 다윗조차 무시하는 악한 죄를 지었습니다. 성도들도 요압과 같은 어리석은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보다는 자신이 드리는 정성에 만족하며 변질 된 헌신을 열심히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도들의 능력이 아니라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잊는 순간 구원까지 자신의 믿음으로 받았다는 교만에 빠지게 될 것이며 멸망할 수 있습니다. 그가 교만하지 않았다면 다윗은 늘 요압에게 감사하며 의지했기 때문에 평안하고 행복한 노후를 보냈을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인간관계인데 요압의 교만이 관계를 해치고 말았습니다.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지키는 것이 믿음이므로 선한 삶을 통해 구원을 지켜야 합니다. 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숙해야 하며 늘 깨어 기도하므로 욕심과 정욕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사무엘하 2장 14절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청년들에게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요압이 이르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다윗이 유다 왕이 되자 사울의 군사령관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마하나임으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은 한반도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인데도 이스라엘과 유다에 각각 왕이 세워지면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요압이 군사들을 데리고 기브온 못 가에 갔을 때 그곳에 아브넬과 이스라엘 군사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아브넬이 신복들로 하여금 서로 겨루게 하자고 요압에게 청하자 양쪽에서 열두 명씩 보내어 전투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아마도 비록 쫓겨 다니고 있지만 결코 이스라엘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군사들은 아군이 죽는 것을 보자 치열한 전투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에서 요압의 군사들은 아사헬과 19명이 전사했고 아브넬의 군사들은 360명이 전사했습니다. 비록 아브넬에게 동생을 잃었지만 요압의 승리로 끝이 난 것입니다. 전세가 불리하자 아브넬과 그의 군사들은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을 죽이기 위해서 쫓아갔습니다. 지금 아브넬이 아사헬에게 쫓겨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브넬이 아사헬보다 훨씬 싸움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넬은 쫓아오는 아사헬에게 나를 쫓지 말고 다른 군사를 쫓는다면 네 체면이 서지 않겠느냐고 달랬습니다. 하지만 아사헬은 유다가 막강한 힘을 가졌고 또 이스라엘이 도망치고 있는 상황에서 돌이킬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큰 권력을 가진 것은 아사헬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유다가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 역시 자기와 상관이 없는데도 아사헬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전쟁에서 살아 남는 것도 지혜이고 능력입니다. 뛰어난 아브넬을 쫓아가면 죽을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인데도 아사헬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해서 아브넬을 향해 달렸습니다. 그리고, 아브넬의 칼을 피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들도 대형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거나 직분을 받거나 재물이 많으면 그것을 자신의 믿음으로 착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느냐고 물어보시는데 사람들은 우리 교회는 성도 수가 많고 목사님이 유명한 사람이며 재물이 많다고 자랑하면서 자신의 믿음과 전혀 상관없는 대답을 합니다. 이런 신앙은 능력과 지혜가 없는 아사헬처럼 영적 전쟁터에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사헬이 아브넬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이길 수 있는 것처럼 교회와 직분과 세상의 소유는 자신의 믿음이 아니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을 죽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미련할 정도로 끝까지 쫓아오는 아사헬을 피할 길이 없어서 그만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작은 사건이 요압이 다윗을 쉽게 배신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윗이 아끼던 압살롬과 아마사와 아브넬까지 죽이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한번 죄를 짓는 것이 힘든 것이지 반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것을 모두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동생이 죽자 오직 복수 하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교만에 붙들리자 요압은 하나님도 다윗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다윗과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수많은 전쟁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수고로 이제 모든 고난이 끝났는데 요압은 결국 교만을 버리지 못해서 멸망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신에게 닥치는 일을 전체적으로 보는 영안이 없으면 요압처럼 복을 누려야 할 때에 스스로 자멸할 수 있습니다. 받은 복이 도리어 사탄의 유혹에 넘어지는 고리가 될 수 있으므로 성도들은 부분적인 것만 보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릇된 오만과 자존을 가지고 상황을 바라보면 문제를 올바로 보고 판단해야 하는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성도들은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말씀을 가지고 이 문제를 어떤 방향에서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이기 때문에 고난을 만날 수밖에 없으므로 문제마다 믿음으로 이겨내는 훈련을 하다 보면 인생 전체를 굳센 믿음으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으로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요압을 거울 삼아 올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영적 맹인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사탄의 올가미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뱀과 같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뱀처럼 죄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므로 죄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모두 잊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데 공헌했고 이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중대한 일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무모할 정도로 복수를 위해서 매달렸습니다. 원수들이 모두 죽자 다윗을 배신해도 죄책감이 없었고 자신을 암흑의 구덩이에 던져도 후회가 없었습니다.

사무엘하 2장 27절

요압이 이르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 하노니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요압은 아브넬에게 속았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군사들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이런 전투는 다윗이라면 아마도 그 제안을 거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은 욕심에 하나님과 생명을 사랑하는 다윗의 뜻을 무시하고 아브넬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요압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다가 사랑하는 동생을 죽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에게 속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하는 성도들이 자신을 과신하게 되면 교만해져서 하나님 앞에 쌓아 놓은 믿음의 열매를 모두 잃게 됩니다. 요압처럼 다윗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힘을 갖게 되었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의 의를 버리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만약 요압이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높이고 다윗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면 그는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교만과 불순종이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억지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은 복을 버린 것입니다.

성도들도 고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헌신하지만 고난이 지나고 평안이 찾아오면 그 동안 억누르고 있던 감정과 혈기와 자랑과 아집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인생 중에 이런 과정을 한번씩 겪게 되는데 이 때 변치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낸다면 축복은 영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탄의 속임에 넘어가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압의 결정이 다윗의 생각이 아닌 것처럼 여러분의 판단과 결정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압이 다윗을 만나지 못해서 죄를 지은 것 아니며 다윗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산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저버리거나 악한 성품을 다스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에 자신의 공로를 끼워서 넣게 되므로 요압처럼 죄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다윗의 능력을 무시한다면 돌이킬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혜로운 자리에 앉아야 하며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말씀을 알고 진리를 깨달은 여러분은 날마다 회개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빼앗기지 않는 평안과 지혜와 복을 받아 누리기를 바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 요압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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