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삯은 사망이라 — 사무엘하 · 조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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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이스보셋의 죽음

사무엘하 4장 4-12절

4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5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6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7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 8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9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10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 11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12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모자람 없이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 만족을 위해서 상대방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은 일방적일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서로 믿고 존중하는 관계는 두 사람의 관계는 물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존중 받지 못하는 관계는 지속될 수 없을뿐더러 자존감이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도 관계가 틀어지면 마음을 전할 수 없으므로 사소한 일에도 오해가 생겨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결국 말과 행동으로 맺어집니다. 매사에 져주는 것처럼 상대방을 배려하고 품어주는 사람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너그럽고 배려하는 큰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만 희생하면서 지속적으로 베푸는 관계는 받는 사람이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좋은 성품을 가졌을 때 오래 지속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방적으로 베푸는 관계는 받는 사람이 받는 것에 익숙하거나 도리어 인색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사람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소홀해지고 무관심하게 되어 결국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관계는 서로 주고 받을 때 신뢰와 정이 쌓이는 것입니다. 어떤 관계이든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신뢰를 갖게 해야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많은 부분이 단단하게 결속되어야만 좋은 관계가 됩니다. 진심을 전하는 것과 진심을 알아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인간관계가 이렇게 중요한 것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올바로 섬기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서 요셉의 인생을 사용하셨고 출애굽을 위해서 모세의 인생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광야로 인도하신 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이방인들의 공격을 막아 주시며 보호해 주셨습니다. 많은 선지자와 사사들을 세워서 죄를 회개하도록 기회도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섬겼기 때문에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출애굽을 시켰기 때문에 일방적인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알면서도 세상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좋을 때 더 순종했다면 많은 복을 받았겠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음으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선지자를 통해 긍휼을 베풀어 주시며 끊임없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그들은 죄책감이 사라졌습니다. 끊임없는 용서는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인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곧 임할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인내하시지만 돌이킬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물로 씻어 버린 것처럼 있던 흔적까지도 없애 버리시는 아주 무서운 분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사랑도 주지만 받기도 원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자녀들이 그 수고를 진심으로 감사할 때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희생을 고마워하고 감사와 존경을 표하며 사랑을 돌려드리려고 한다면 자녀를 위한 수고는 도리어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녀는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기는 하지만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 될 수 있는데 의무로 맺어진 관계는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과 관심과 배려없이 의무적인 관계처럼 의미 없는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닌 신으로 대했습니다. 긍휼하심과 기적을 경험했으면서도 인간의 의를 버리지 못해서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이용하는 우상으로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늘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곤경에 처하면 부르지 않아도 먼저 보호해 주셨고 죄의 길로 가면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응답을 받고 난 후에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떠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사람은 잠깐 잘 살 수 있겠지만 회개를 반복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무엘하 22장 44절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전 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자녀로 산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지켜내기 힘든 신앙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처음과 나중 되시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과 자신을 위해서 신으로 섬기는 사람은 신앙의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인생의 목적지와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인생의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어서 사탄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으므로 아브넬처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는 다윗은 굳이 원수를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아도 그들이 스스로 침몰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4장 1절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넘기겠다고 협박하며 떠난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스보셋은 무척 놀랐습니다. 사울의 첩을 취하는 죄를 짓고도 당당했던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은 이스보셋도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간 것은 이스보셋 입장에서는 절망입니다. 그런데, 그가 살해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다윗이 너무 큰 사람으로 느껴져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는 다윗이 아브넬을 죽였다고 생각했으므로 다윗의 공격을 막을 힘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 두 군장인 바아나와 레갑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보셋은 진심으로 그들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보셋이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바아나와 레갑은 이미 그를 배신할 계략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스보셋이 자신들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자 왕을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스보셋은 낮잠에 빠졌고 바아나와 레갑은 자고 있는 왕을 죽이고 다윗에게 도망갔습니다. 그들이 다윗의 성품을 알았다면 왕을 살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장인 자신들이 빈손으로 간다면 다윗이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했기에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복수하지 않았던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만 알았다면 이렇게 악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축복받기 위해서 정성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아나와 레갑처럼 인간적인 정성을 준비하면서도 그것이 죄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믿음과 충성을 받으시는지 전혀 모른 채 거짓된 충성과 헌신을 드리고 있습니다. 자비한 자에게 주의 자비하심을, 완전한 자에게 주의 완전 하심을, 깨끗한 자에게 주의 깨끗하심을, 사악한 자에게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 가지고 간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믿음 없는 정성과 헌금과 기도와 찬양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말씀대로 살면서 정직한 믿음으로 드리는 헌신을 받으십니다.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을 죽였다고 하면 다윗이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죽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원한 것이 아니라 비록 적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을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보기 좋게 포장한 신앙을 드리며 복을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당신이 좋아할 것 같아서 정성껏 준비했으니까 상을 달라고 간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세상은 선물을 주고 받는 사람들의 마음보다 선물의 화려한 포장과 진심이 없으면서도 인사치레를 했다는 형식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겉치레가 결국 내용보다는 다 뜯어 버릴 포장에 더 많은 돈과 정성을 쏟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외모보다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의 목을 가지고 다윗에게 빨리 가기 위해서 헤브론으로 가는 지름길인 아라바 길을 밤새도록 달렸습니다.

다윗이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받을 칭찬과 상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원수를 죽였다고 하면 크게 기뻐하며 상을 줄 것을 기대했기에 그들은 헤브론으로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원수를 죽이는 성과를 올리고도 하나님과 다윗을 멸시한 죄로 그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보다는 일을 진행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말과 행동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데 그 이유는 과정이 선하면 결과가 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은 빠르게 진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주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은 바아나와 레갑이 하나님을 위해서 이스보셋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화를 위해서 죽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처럼 하나님보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하 22장 48-49절

48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하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하시며 49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이스보셋이 죽었다는 것은 다윗에게는 좋은 소식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름길로 밤새 달려 왔다고 해도 이스보셋을 죽인 이유가 자신들의 욕심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살려둘 수 없었습니다. 악한 자들의 열매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대신 보복하시고 언젠가 원수들이 굴복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자기를 대적 위에 높이 세우시고 아무리 강포한 자가 해하려고 해도 막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선수들이 시합에서 제일 먼저 결승선을 통과해도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실격 당하고 맙니다. 정해진 규정대로 경기하지 않는다면 제일 먼저 결승선을 통과해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성도들의 신앙도 이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목숨을 다해 헌신 한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종교 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기 규칙을 모르고 경기에 임하는 선수는 없습니다. 메달을 따기 위해서 선수들은 경기 규칙을 철저히 숙지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도 메달을 따기 위해서 규칙을 지키는데 하물며 천국에 가겠다는 하나님의 백성이 법을 몰라서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 개의 메달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훈련하는 선수처럼 성도들은 구원을 위해서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내야 합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운동 선수들이 시합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반복해서 훈련을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선수는 훈련 받은 대로 경기에 임해야 메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훈련을 많이 해도 경기 규칙을 어기면 훈련은 헛된 것이 되며 원하는 메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시합의 승패는 온전히 선수에게 달렸습니다. 시상대에 올라 메달을 받는 사람도 선수이고 메달의 영광을 누리는 것도 선수이기 때문에 경기 결과에 대한 책임도 선수가 져야 합니다. 경기의 결과에 대해 남의 핑계를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말씀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거짓 복음을 들어도 판단할 능력이 없으므로 올바른 진리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아야만 진리를 왜곡해서 전하는 목회자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목회자를 잘못 만나서 진리를 듣지 못했다고 하거나 세상이 너무 바빠서 신앙생활을 잘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으므로 지금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이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의 신앙이 아니라 본인의 믿음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4장 11절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다윗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 달려온 바아나와 레갑에게 어떻게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그의 침상에서 죽일 수 있느냐고 크게 화를 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일이었지만 그 판단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무엘상에 기록된 말씀이 다윗의 연단이었다면 사무엘하는 다윗의 원수들이 한 명씩 심판 받는 사건입니다. 악한 자들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다윗의 원수들을 죽이는 바람에 다윗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대신 복수해 주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원수들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욕심으로 득을 보았지만 매번 복수해준 자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집이 멸망을 당하고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처럼 동일한 사건을 계속해서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윗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깊이 깨닫는 삶을 산다면 앞으로도 그를 도와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해 달라는 이 기도를 다윗이 실천한 것입니다. 성도가 먼저 죄 지은 자를 용서했을 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만이 방패와 산성이시며 능력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은 개미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만 용서하실 수 있고 원수들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진실 된 신앙으로 자기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직접 사울의 집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은 원수를 용서하겠다는 마음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복수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그런 믿음을 보시고 대신 복수해 주신 것을 보면서 성도들도 다윗과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사울의 자손들은 모두 죽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만 살아 남았습니다. 사울의 집안이 멸족을 당하는데도 므비보셋이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요나단이 했던 약속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요나단은 다윗이 곤경에 처했을 때 사울 왕의 공격을 막아주었고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선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던 요나단의 신앙이 아들 므비보셋을 살린 것입니다. 부모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요나단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진실 된 믿음인지 아니면 복을 받기 위해서 한 거짓된 믿음인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진심으로 충성하거나, 거짓된 마음으로 충성하거나 어떤 삶을 살든 많은 시간과 희생과 노력이 필요 합니다.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그만한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든지 정해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면 이왕이면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지만 그들의 끝은 달랐습니다. 그것 역시 사울과 다윗의 선택이었으며 그들이 선택한 결과입니다. 사울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했고 다윗은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을 단호하게 버렸기 때문에 결과가 선과 악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다윗의 승리로 두 집안의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연단을 끝내실 때까지 믿음으로 견딘 것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어쩌면 그는 고난을 당할 때 믿음으로 인내하겠다는 마음보다는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견뎌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다윗이 원수를 사랑해서 용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에 죽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올바로 알면 정직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다윗을 칭찬하시며 통일 왕국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제 나라도 왕위도 모두 받았음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펼치며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라와 백성을 사랑한다면 그는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지혜로운 왕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지면 언제나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도 있고 응답을 받을 수 있으므로 정직하게 인내하는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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