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된 두 사람의 신앙
사람들은 수가 많은 곳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판단과 전혀 상관없이 진실하고 정직한 믿음을 도와주십니다. 이런 사실은 세상의 힘을 가진 바리새인과 세상에서 무시당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어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사람들과 따로 서서 기도하기를 나는 토색과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또 세리와 같지 않은 것에 감사드린다고 하면서 자기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리고 있다고 자신 있게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리새인이 책망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기도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바리새인의 교만을 탓하기 전에 나도 그 사람처럼 하나님의 법을 정직하게 준행했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보다 법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를 판단할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그 모든 행위를 자신의 의로 삼았기 때문에 책망을 들었지만, 그래도 그 사람은 최선을 다해 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자신의 의를 버리지 못한 자’라고 말씀 하시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바리새인의 신앙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과 멀리 떨어져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가 있었습니다. 세리는 감히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오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세리가 바리새인처럼 헌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개한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세리는 바리새인처럼 재산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세상의 삶과 상관없이 자신은 언제나 하나님께는 죄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받은 모든 것을 자신의 의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빚진 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를 높이시고 품으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처럼 사울과 다윗을 바라보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를 드러내는 사울보다는 순종의 믿음을 가진 다윗을 높여주셨습니다. 다윗은 어린 목동이었지만 사나운 짐승이 양을 물어가려고 할 때, 자신의 생명을 걸고 양을 구했으며 최선을 다해 맡은 일에 충실했습니다. 이렇게 성실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누구의 인정을 받기보다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그의 노력은 돌을 잘 던질 수 있도록 훈련되었으며, 그 기술은 훗날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주어진 일과 시간에 충실해야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기술을 자신도 모르게 습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 없는 환경과 사람과 시간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훈련을 받은 다음 다시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전에 그 환경과 사람을 왜 만나게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골리앗을 만났을 때 평상시 배웠던 돌팔매를 자신 있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4장 6절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은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블레셋 진영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때 사울은 육백 명의 군사를 데리고 미그론에 머물렀고, 아히야는 대제사장으로서 에봇을 입고 사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히야는 엘리 제사장의 증손자이고, 비느하스의 손자입니다. 지금 성경이 사울 곁에 육백 명의 군사와 아히야가 에봇을 입고 있다고 굳이 기록한 것은 말씀을 거역하고, 사무엘까지 버린 사울이 마치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행동이 가증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사울과 같은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칭찬하지 않으면 일하지 않고, 목회자가 권면하면 기분 나빠하고, 자기가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한다면 사울과 바리새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늘 진실해야 합니다.
요나단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에게 가자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일하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자라는 말속에 하나님을 향한 요나단의 절대적인 신뢰가 숨겨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블레셋 진영으로 가기 전에 하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단에게, 블레셋 사람이 너를 보고 자기가 내려오겠다고 하면 피하고, 너에게 올라오라고 하면 승리할 것이니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을 본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겠다는 말씀을 들은 것처럼 그에게 올라오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요나단에게는 무기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요나단처럼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적진으로 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말씀에 의지하여 올라갔고 그 믿음은 승리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15절에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이 공포에 떨 정도로 큰 진동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이 요나단의 믿음을 통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응답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죽으면 죽으리라는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블레셋 진영까지 가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도우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베냐민 기브아에서 파수꾼이 적진을 바라보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며 우왕좌왕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없어진 것을 알고, 아히야에게 언약궤를 가져와서 요나단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아히야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 사울이 블레셋 진영을 보니까 소동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에 요나단이 승리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 사울이 보는 이 상황은 요나단이 하나님의 큰 도움을 받으며 승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요나단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자 아히야에게 기도를 멈추라고 했는데, 더 이상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 없이도 승리할 것 같자 바로 하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성도들도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다가 문제가 해결되어 편안해지면 교회도 멀리하고 봉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욕심을 갖고 감사를 잊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의 축복을 잃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헌신하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도리어 요나단의 충성을 자신의 교만으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그는 요나단이 싸우고 있는 전장에 갔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류하여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의 패배는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3장을 보면, 블레셋은 전쟁을 위해서 병거 삼만, 마병 육천, 해변의 모래 같이 많은 백성들이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을 쳤다고 했는데, 믹마스에서 20km 떨어진 블레셋 국경인 아얄론까지 후퇴한 것입니다. 사울과 요나단만 무기를 가졌던 열악한 이스라엘이 엄청난 무기를 소유한 블레셋 군대를 물리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전쟁은 수적인 싸움이 아니며 인간의 머리로 계산하고 책략을 세워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세상의 전쟁 역시 수적인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요나단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인생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맡길 때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사울은 블레셋을 물리치고 나자 욕심이 생겼습니다. 요나단처럼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나님께 겸손할 수 있는데, 사울처럼 은혜로 쉽게 얻으면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백성들은 무기도 없이 전쟁을 하느라 지쳐 있는데, 사울은 내가 내 원수를 모두 물리칠 때까지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왜 이 전쟁이 사울의 전쟁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의 믿음 위에서 하나님의 전쟁을 하신 것인데 사울이 그 영광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성도들이 흔히 행하는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나면, 그때부터는 내가 맡아서 잘 할 수 있다며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배제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는데 당장 주어진 세상의 힘은 모래처럼 쉽게 손가락 사이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믿고 있을 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고, 사람을 믿고 있는데 그 사람이 배신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무엇이든 변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내 전쟁을 위해서 수풀에 꿀이 흐르고 있어도 먹지 말라고 금식을 선포하였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 없고 오직 욕심을 채우기 위한 명령이었습니다. 이런 사람 곁에 있으면 피곤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헌신은 요나단이 했는데, 그 영광을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결국 피해는 곁에 있는 백성들이 당하기 때문입니다. 저녁까지 양식을 먹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세상의 왕이 정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흐르는 꿀을 보고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의 욕심은 모두 하나님과 상관없는 결정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거든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여러분을 인도하시는지,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고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모두 응답하실 것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욕심은 죄를 잉태하게 하고 죄는 사망을 부릅니다. 규례에 고기를 먹을 때 피까지 먹어서는 안된다고 정해져 있지만, 배가 너무 고픈 백성들은 양과 소와 송아지를 잡아서 피까지 먹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욕심이 백성들의 죄로 이어진 것입니다.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고, 더 나아가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구원받는 모든 영혼들의 생명의 근원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법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전쟁 중이었던 요나단은 아버지의 명령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피곤을 달래기 위해서 꿀을 찍어서 먹었는데 눈이 밝아졌습니다. 나중에 사울의 명령을 들은 요나단은 자신이 꿀을 조금 먹고 힘을 얻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명령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은 영적 전쟁터인 세상에서 늘 흐르고 있는 말씀의 꿀을 먹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피곤하여 큰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사탄과 전쟁을 하면서 지칠 때마다 말씀의 꿀을 먹어야만 이겨낼 수 있고, 영적인 눈이 밝아져 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44절에 명령을 어기고 요나단이 꿀을 먹었다는 것을 안 사울은 분노하며 자신이 정한 법대로 요나단이라 할지라도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며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명령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울이 인간적인 감정으로 정한 것입니다. 사울의 악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37절에 사울이 블레셋을 추격하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겠냐고 물었을 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응답을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었던 사울의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은 것인데, 만약 대답을 하셨다면 그것마저도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교만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자 응답을 받지 못한 이유를 꿀을 먹은 요나단 때문이라고 그에게 죄를 전가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늘 다른 사람에게서 핑계를 찾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서 핑계거리를 찾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죄를 바로 시인하고 잘못을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이며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23절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공중권세를 사탄이 잡고 있기 때문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사탄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어둠의 권세 아래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죽은 자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산 자로 거듭난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이제 사탄을 아버지로 혹은 남편으로 섬기던 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섬기는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사울처럼 죄를 덮기 위해 여러 가지 핑계를 대지 말고 말씀으로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나단처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다고 고백을 할 때,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 비록 칼 한 자루일지라도 세상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으며 자족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에게 육백 명의 군사가 없어도, 에봇을 입은 제사장과 함께 있지 않아도, 세상의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꿀을 먹었어도, 하나님은 요나단과 함께 하셨으며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모든 승리는 요나단의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치르고 있는 전쟁은 누구의 전쟁입니까? 욕심으로 치르는 전쟁이라면 결국엔 패배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하나님의 전쟁이라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상반된 신앙을 보며 여러분의 믿음이 어디에 속했는지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판단하시고 요나단의 편에 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만 승리하는 방법을 알려주실 것이고, 그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실 것이며 여러분이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정직하고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