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보다 나은 순종 — 사무엘상 · 조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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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

사람과 사람의 대화는 상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친구가 친구의 이름을 부르고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대화는 시작됩니다. 그 중에 세미한 음성으로 자녀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부르면 즉시 대답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영으로 들어야만 들을 수 있기에 영적으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롯해 많은 선지자들과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선지자들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 수 있었으며, 당당히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며 듣고 싶다고 원해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귀를 열어주셔야만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세미한 음성으로 사무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본문 1절에 사무엘을 ‘아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의 사무엘이 12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은 엘리의 감독 하에 본격적으로 제사장의 직무에 참여하며 성전 봉사를 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사무엘이 제사에 참여했다고 해도 그는 아직 어린 아이였고, 제사장인 엘리는 타락했기 때문에 그동안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며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때였습니다. 지금 건물마다 교회가 들어서 있고 목회자와 성도는 넘치도록 많지만 진리를 온전히 깨닫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한 것과 동일합니다. 성도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는 ‘엘리가 눈이 점점 어두워져서 잘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전에 있기 보다는 비둔하여 자리에 누워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눈이 어둡다는 것은 그가 늙었으므로 육의 눈이 나빠졌다는 뜻도 있겠지만, 영적으로 빛 가운데 있지 못하고 어둠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하나님께 열심을 내지 못하는 육의 사람들은 모두 엘리와 같이 영적으로 눈이 어둡고 비둔한 자들입니다.

반면 신명기 34장 7절에는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받은 모세는 천국을 예표하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느보 산에 올라 비스가 산 꼭대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때까지 눈이 흐리지 않았고 몸이 강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제 그의 사명이 끝났다고 하셨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에서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모세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가나안 땅에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가야 하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을 예표하는 여호수아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모세가 받은 율법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깊은 뜻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모세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인생의 목적지였던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목회자와 성도는 모세처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믿음으로 살아야만 영혼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최선을 다해 가르쳐준 말씀은 「신명기」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모세와 같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등불이 켜져 있는 여호와의 전에 있었던 반면 그 직분을 행해야 하는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엘리는 자기의 처소에 누워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와 사무엘이 가진 신앙의 차이입니다. 어린 사무엘에게 꺼트리면 안되는 등불을 맡겨두고 제사장인 엘리와 홉니와 비느하스는 자신들의 직무를 소홀히 하였습니다.

레위기 24장 3절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이 말씀을 보면 엘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등잔불을 정리하는 것은 제사장이 매일 저녁마다 성소 안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일곱 가지로 뻗은 촛대에 불을 밝히는 직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제사장 아론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등잔불이 꺼지지 않도록 정리하고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엘리와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직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는데도 어린 사무엘을 홀로 그곳에 두고 각자 자기들의 처소에 누워있었습니다. 혹시라도 기름이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등불이 꺼지지는 않았는지 살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육적인 이익을 위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본을 보이지 못하고 게으른 자리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왜 깨어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열 처녀는 신랑을 맞이해야 결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두 등잔불을 밝히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혹시 늦게 오면 등불을 밝힐 기름이 모자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다른 그릇에 기름을 더 준비해 두었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미리 준비한 것입니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이미 등에 기름을 가득 넣었다는 생각에 여분의 기름을 따로 준비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충분히 기름을 채워 놓았다고 생각한 그들은 신랑이 오는 시간이 늦어지자 등불을 켜 두고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한밤중에 신랑을 맞이하라는 소리가 들려 깨어보니 열 처녀가 들고 있는 등불에 기름이 떨어지면서 밝게 빛나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 둔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다시 기름을 채워 불을 밝혔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안일한 생각으로 인해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신랑이 올 때까지 어떻게 해야만 기쁘게 신랑을 맞이할 수 있을지 미리 세심하게 살폈더라면 열 처녀 모두 신랑을 맞이하는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이 해야 하는 일은 신랑을 만나는 순간까지 등불을 밝히는 일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일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적당히, 대충 준비하다가는 신랑이 와도 결국 신랑을 맞이할 수 없는 불행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도 제사장의 직분에 최선을 다해 충성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그 직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잊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영혼은 메말랐고 영안이 어두워져 더 이상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감람나무 잎사귀를 찧어서 얻는 순결한 기름은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역사를 이루시고 승천하시면서 보내신 성령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선악을 분별할 수 있고,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날 준비를 완벽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순결한 기름으로 등잔불이 꺼지지 않도록 불을 켜 놓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령의 불로 세상을 밝혀 모든 영혼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만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8장 11절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노아는 방주 안에서 세상을 덮은 물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 수 없어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냈습니다. 까마귀는 세상에 사체가 많아 먹고 살 것이 풍족한 것을 보고 세상을 날아다니며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까마귀와 같이 세상을 좋아하는 영혼은 그리스도의 방주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까마귀를 기다리던 노아는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온 지면이 물과 사체로 가득한 세상에서 머물 곳이 없는 것을 본 비둘기는 다시 방주로 돌아왔고, 노아는 다시 칠 일 후에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비둘기가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죽음의 물로 덮였던 세상에서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온 것은 죽음의 세상에 새 생명을 주실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향해 날아간 까마귀와는 달리 생명의 잎을 물고 돌아온 비둘기처럼 성도들은 홍수에 잠겨 있는 세상에 머물 곳이 없음을 깨닫고 구원의 방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순전한 자녀라면 비둘기처럼 죽음만 가득한 세상에서 머물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아에게 방주 외에는 안전한 곳이 없었던 것처럼 성도들에게 세상은 안전한 곳이 아님을 알고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해야만 합니다.

그 감람나무 잎을 찧어 기름을 얻은 것처럼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이렇게 귀한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엘리가 하나님 앞에 보인 불충성은 절대로 성도들이 해서는 안되는 행동입니다. 엘리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아는 제사장이었듯 여러분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잘 아는 성도입니다. 말씀을 아는 성도이기에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헌신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성령께 의지해야 하고, 어둠을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었을 때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엘리가 시킬 일이 있어 부른 줄 알고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성도들도 처음 말씀을 들을 때는 잘 분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이 진리를 깊이 깨닫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엘리와 같이 영적으로 먼저 된 자들이 아직 말씀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사무엘에게 진리의 길을 쉽게 갈 수 있도록 가르쳐줘야 합니다.

만약 엘리가 충만한 상태였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사무엘과 함께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더 확실하게 가르쳐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는 사무엘이 세 번이나 달려와 부르셨냐고 물을 정도로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였습니다. 영적으로 앞서 있는 자가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 더 민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무엘이 듣는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세미한 음성은 기도 중에,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설교를 듣는 중에, 몸으로 헌신하는 중에, 전도하는 중에 들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바로 세미한 음성을 듣고 순종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간에 대화를 하듯 귀로 들어야만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헌신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과 계획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알려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죽임을 당한 후 삼 일 만에 다시 사실 것이라는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시지만, 들을 귀가 없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오히려 예수님을 말립니다. 그는 주님께서 그러시지 않기를 바라며 그런 일이 절대로 주님께 미치지 않을 것이라며 항변하였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반응은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을 걱정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신 것을 보면, 깨달음이 없는 믿음이 곧 사탄의 생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이 세 번이나 와서 자신을 불렀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리에 누워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대답할 바를 알려주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데 그대로 자리에 누워 사무엘을 가르치는 엘리의 모습을 보면 그의 신앙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신앙을 갖고 살아갑니다. 온 마음을 다해 충성하지 않고 말씀을 적당히 아는 선에서 하나님의 일을 적당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뜻을 다하지 않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요즘 교인들은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고 진리만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는 성도들을 향해 오히려 맹목적인 신앙이라고 조롱하고 그런 신앙은 문제가 있다며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엘리처럼 자리에 누워 있는 자입니다. 엘리도 한때는 하나님을 위해 충성했을 때가 있었고, 최선을 다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때가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라고 알려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경험한 엘리가 영적으로 우둔해진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세미한 음성을 들었던 경험과 하나님께 충성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진노가 어떤 것인지 다 알고 있음을 뜻합니다. 매일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않았다면 엘리는 교만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보다 엘리를 통해 하늘의 비밀을 더 많이 말씀해 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자신을 인정하기 때문에 교만해집니다. 적당히 말씀도 알고,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 경험하게 되면서 그 지식으로 자신을 높이기 때문에 엘리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 경험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불평을 하고 상대를 가르치려 들기 때문에 결국 넘어지고 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더라도 교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헌신하는 가운데 권면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겸손한 자리에서 변함없이 충성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 믿음이 아까워서라도 사명을 맡기시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무엘상 3장 15절에 보면,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엘리의 집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 너무 두려워 차마 엘리에게 그 말씀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태연하게도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고 협박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후손이 모두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이미 신앙을 버렸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들들이 비록 악한 행동을 하고 있지만, 제사장인 자신의 품에 있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 엘리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엘리가 취하는 태도를 보면, 그의 두 아들이 왜 믿음이 없는지 그리고 죄를 짓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의 태도가 설명이 됩니다. 엘리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백성들에게 거짓을 행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막 여인과 간음을 해도 책망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감당하며 제사를 지내야하는 사람이 자기 아들들의 죄는 덮어주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2절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화인을 맞으면 그 자리는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으면 자기가 지금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어떤 말과 행동이 잘못된 것인지 조차 알지 못하게 됩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으면 엘리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지만, 말씀 안에 거하면 사무엘처럼 그가 전한 말씀은 모두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말씀이 그의 삶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할 때, 구원받을 영혼들이 여러분을 신뢰할 것이고 그 신뢰를 넘어 하나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사무엘상 3장 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시고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또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사무엘에게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육신에 죄를 담고 십자가에서 다 씻어주셨고 이제 승천하셔서 재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예수님을 보려 하지 말고 말씀으로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이 곧 능력이고 생명이며 창조주이십니다. 엘리의 가정을 심판하시기도 하고 사무엘을 축복하시기도 했던 그 말씀이 지금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주시는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사무엘처럼 말씀대로 산다면 놀라운 축복을 받겠으나, 말씀을 받고도 엘리와 같이 안일하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하게 모든 심령에 부어지지만, 그 은혜를 받을 그릇이 준비돼 있어야 온전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늘 영적으로 깨어 있다면 그분의 세미한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언제나 사무엘처럼 깨어 말씀대로 순종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사무엘상 4장 17-22절

17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육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 되었더라 19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21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제사보다 나은 순종 ·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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