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없는 자의 선택
오늘은 사무엘상 마지막 설교입니다. 서른세 번에 걸친 사무엘상 강해를 통해 성경에 있는 사건들을 세상으로 꺼내어,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판단과 결정을 하는지 배웠습니다. 성경말씀은 세상에서 일어났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믿음의 사람들이 행한 대로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이 말씀을 중심으로 세상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응답을 받는 방법과 책망을 받는 이유가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많은 세상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새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것이며, 생명이 주는 영원한 밝은 빛으로 올바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영생과 영벌로 갈라지는 무서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참된 지식을 알고 믿음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라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을 처음 시작했을 때, 다윗보다는 사울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사울을 중심으로 모든 사건들이 전개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처럼 자기들도 사람을 왕으로 세워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직접 사울을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왕이 된 사울은 처음에는 겸손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사무엘이 원하는 대로 모든 비밀을 지킬 정도로 순종도 잘한 사람이었습니다. 부모에게는 효도하는 아들이었고, 선지자인 사무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했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노력도 했습니다. 좋은 가문에 외모도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존경하며 그들처럼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축복을 받고도 작은 고난에 쉽게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왕이 되기 전까지는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사울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면서 왕으로 만들어간 사람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만나면서 질투의 감정이 생기자 사무엘의 권면도 듣지 않았고 혈기를 이기지 못하여 악인으로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셨다는 것도 잊어버렸고, 사무엘이 왕으로서 바르게 살도록 도와주었던 노력과 사랑까지도 다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왕이라는 교만한 마음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닌 것입니다.
물론 교만과 질투가 그를 변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사울은 처음부터 그의 내면에 성장하지 못한 인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도와줄 때는 변한 듯 했지만, 결국 처음 자리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잘 섬기는 왕이 되도록 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고 권세와 물질로 채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하나님은 물론 사무엘까지 모두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을 모두 갖게 되자 하나님도 사무엘도 필요 없어진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조금 맞지 않으면 미련 없이 하나님과 은혜와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버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릇이 작은 사람입니다. 그릇이 작은 사람도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할 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며 처리할 수 있지만, 사울처럼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면 감정에 치우치거나 문제가 커 보이므로 실족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울은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윗이 자신보다 더 인정을 받는 것처럼 보이자 숨겨져 있던 악한 육성이 드러났습니다. 사람은 육이 연약하기 때문에 중심을 잡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좌에 계시든 죄인의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오시든 상관없이 일관된 목적을 가지고 사신 것처럼 우리도 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한 목적이 없으면 환경 때문에 좌절하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판단에 따라 믿음까지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보다는 감정에 따라 문제를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큰일에 동참시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왕으로 부름 받았을 때는 두려움도 있었고 겸손했지만, 점차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자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칭송하자 그에게 잠재되어 있던 악한 인간성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의 근본은 이렇게 변하기 힘든 것입니다. 사무엘이 곁에서 아무리 가르치고 이끌어줘도, 인간의 의가 죽어야만 버릴 수 있는 악한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며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인간의 의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려고 날마다 죽는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보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모든 것은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서 장점까지도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자기의 능력 이상으로 자신을 과대평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들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자신을 버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한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줄 때마다, 자신의 의와 생각과 감정과 혈기를 버리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장하는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과 질투와 혈기를 버리지 않자 실패한 것입니다. 제가 사무엘상을 강해하면서 재차 강조했지만, 생명과 그리스도와 영혼구원을 중심에 두고 삶을 살아야만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만나도 생명과 그리스도와 영혼구원을 중심에 풀어간다면, 그 문제를 던진 세상보다 훨씬 더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만만이라고 높여주었을 때, 감정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왕이 베풀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윗뿐만 아니라 다른 신하들까지 모두 칭찬했다면 사울은 더 많은 것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자신의 권력과 자존심과 의를 감싼 미련함을 삶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왕인데 왜 다윗이 더 칭송을 받느냐는 어리석은 생각이 그를 괴롭혔고, 결국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사울을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 그릇만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이 영적인 세계를 알려주었을 때 인간의 의를 버렸다면,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로 큰 그릇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자기의 감정에 충실했기 때문에 결국 무너졌습니다. 절대 권력을 가졌던 왕이 슬퍼해주는 사람도 없이 아들들과 쓸쓸하게 죽어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사울을 악하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왕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왕으로 살 수 있었으며, 왕으로서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욕심과 아집과 혈기가 그를 무너뜨리고만 것입니다. 다윗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고 말을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그릇의 크기는 어떻습니까?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품을 수 있는 크기입니까? 욕심은 많아서 모두 갖고 싶고 모두 품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아서 불평만 하고 힘겨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은 망망한 바다와 같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잔잔한 바다 위에 있고 세상 사람들은 거친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거친 파도를 만날 수 있고, 잔잔한 바다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어려운 환경이나 평안한 환경을 만나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본다면 세상에서 만나는 문제들이 축복인지 아니면 성장시키기 위한 훈련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극복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사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3-4절에 보면 사울은 블레셋 사람이 쏜 화살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운 사울은 무기를 가진 부하에게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죽일 수도 있으니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부하가 듣지 않자 자신의 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말을 잘 들어보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렵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믿음이 있다면 중상을 입은 이 상태에서 할례 받지 않는 블레셋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회개하며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하나님께 죄를 짓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겠다고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면 그토록 비참한 죽음을 맞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심령에 그리스도를 모셨는지 아니면 세상의 영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하고 짐승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면 어떤 문제를 만나든 바로 답이 나올 것입니다.
6절에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함께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단도 함께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다윗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친형제처럼 사랑하고 돕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선한 사람이 악한 사울과 함께 죽는다는 것이 어쩌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생명과 영혼구원을 중심에 두지 않고 성경을 읽게 되면, 이 사건처럼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요나단처럼 선한 사람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악인이 부하게 살고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보고는 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가 죄 없는 다윗을 괴롭힐 때 언젠가는 하나님께 크게 책망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를 버릴 수 없는 아들이기에 다윗에게 자신의 후손을 부탁한 것입니다. 요나단은 비록 아버지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가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사울의 죽음과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생각할 때 악인과 한 자리에서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에 요나단의 죽음이 억울해 보일 수도 있고, 혹시 심판을 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착한 사람은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나그네처럼 지나가는 길이기 때문에 어떤 일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면 천국에 간다는 믿음만 가지고 살아간다면 세상의 문제로 혼란스러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영웅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애도합니다. 요즘도 존경 받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고 그들의 뒤를 따라 죽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이생만 보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11절에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고, 그와 세 아들을 성벽에 박아 놓았다는 악행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죽을 각오로 밤새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사울과 세 아들을 화장한 다음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며, 왕과 왕자들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과 왕자들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하고, 또 그들의 시체를 훼손하는 블레셋의 악행이 괘씸하여 죽을 각오로 밤새 달렸던 길르앗 사람들의 충성은 칭찬 할만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명을 걸고 시신을 모셔왔다 할지라도 사울의 영혼과 그의 아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왕자들의 시신을 가지고 와서 칠 일 동안 금식하며 애도했지만, 그저 슬퍼하는 것 외에는 왕과 왕자들을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자들의 한계입니다. 아무리 슬프고 억울해도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릴 수 없으며,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하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요나단의 죽음은 달랐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원하는데도 왕이 되지 못했고 다윗에게 자신의 후손을 맡기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요나단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성도라면 이제 세상과 동일한 눈으로 사람들의 죽음을 보지 말고, 성도의 눈으로 생명을 중심에 두고 생명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새 생명이 있는 자가 이사야처럼 톱으로 죽임을 당하고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처럼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해도 그들은 불행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삶을 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위해서 죽은 그들은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냉정하게 세상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신앙이 세상 사람에게 비난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므로 성도들은 냉정하게 판단하고 신앙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사울처럼 자기의 죄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처럼 아버지가 악인일지라도 자식된 도리로 함께 나라를 지키다가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를 지켜드려야 하기 때문에 요나단은 아버지 곁을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성도일지라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호흡하는 동안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면, 죽음 이후에 하나님을 만났을 것이며 다시는 사망이 없는 영생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울이 처음 신앙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로 살면서 많은 복을 누렸을 것이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자 사무엘의 충고도 들리지 않았고 하나님의 은혜에도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낸 것을 보면 사무엘조차 자신의 백성으로 보고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권면하는 목사나 성도나 가족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권면하는 것이라고 믿고 가던 길을 돌이키고 계십니까? 아니면 내 감정대로 내 혈기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내 뜻과 다르기 때문에 혈기를 내고 계십니까? 누구나 사울이 될 수 있으며 누구나 다윗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만 합니다. 여러분께서 제가 드린 말씀이 충분히 이해가 되셨다면 요나단의 죽음이 비참한 것이 아니며, 침상에서 편안하게 죽는다고 해서 축복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사후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믿음으로 진리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무엘상 강해를 마치고자 합니다. 설교를 듣고 다윗의 길로 돌이킨 성도도 있을 것이고 사울의 길로 가면서도 고집을 피우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두 돌이켜서 축복 받기를 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무엘상 강해를 듣고도 사울의 자리에 그대로 있다면 하나님께서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비록 많은 실수를 했지만 돌이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세상의 축복도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다윗의 길도 사울의 길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바른 판단과 결정은 여러분이 선택하는 것이며, 그 선택으로 구원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하늘의 축복을 받고 누리는 성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언제나 다윗처럼 지혜롭게 그리고 정직하게 믿음을 지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