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보다 나은 순종 — 사무엘상 · 조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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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속건제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고 큰 승리감에 취해 있던 블레셋 사람들은 이제 그 궤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됐습니다. 블레셋으로 들어가셔서 스스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감당하지 못한 그들은 다시 궤를 이스라엘로 보내기 위해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을 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이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기고 하나님의 궤를 빼앗은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을 멸시하는 블레셋의 승리는 이미 그 자체로 패배입니다. 세상에 속한 블레셋은 그것을 알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실패를 하나님의 실패로 여겨 하나님을 조롱하며 하나님마저도 쉽게 여기다가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작은 생각에 가두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이용하려던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을 이긴 승리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멸시한 블레셋도 모두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오늘날 성도와 세상 역시 이들과 동일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마음에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세상의 우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다가 도리어 심판의 자리에 앉고 있습니다.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긴 이스라엘과 거룩한 언약궤를 다곤 신상 앞에 모셔 놓고도 두려워하지 않던 블레셋을 보면서 이제 성도들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이 사건을 기록하신 이유는 그들의 삶을 보면서 그들과 동일한 죄를 짓지 않길 바라시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조상들의 실패를 보고도 그들과 동일한 선택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을 것이며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블레셋은 하나님께서 다곤 신상을 무너뜨리시고 독한 종기로 재앙을 내리시자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겨 언약궤를 가드로 옮겼습니다. 가드의 백성들이 또 고통을 당하게 되자 이번에는 언약궤를 에그론으로 옮겼습니다. 가드에서 태어난 골리앗을 생각해 보면 그곳 사람들이 육적으로 얼마나 뛰어난 사람들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고 문명이 발달했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드 사람들은 그저 말씀에 무지한 세상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있다면 세상에서 힘 있는 자를 만날지라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부르실 때 세상을 뛰어넘어 그 위에서 부르신다는 것을 성도가 알아야만 비로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에그론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독종으로 고통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나님의 궤가 자기들에게 오는 그 자체로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궤가 그들의 진영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막았을 것입니다. 궤가 승리의 전리품일 때는 기뻐하던 그들이 이제 재앙을 주는 두려운 대상이 되자 버리려고 합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간 지 일곱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본문 2절에 블레셋 사람들은 승리의 전리품이던 궤가 저주를 내리자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멀리 내다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언약궤를 사람들이 있는 곳에 두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소원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을 닫고는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무엇이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블레셋과 같이 자기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멀리하는 그 자체가 바로 악입니다. 세상의 삶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거듭난 성도의 모습이며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다곤을 섬기는 제사장과 복술자들은 골칫거리가 된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로 무사히 보낼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다윗처럼 세상의 권세를 가진 왕의 모습으로 오셔서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보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자 세상의 잣대로 예수님을 죽이려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유대의 지도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궤가 세상의 삶을 방해하자 블레셋은 하나님의 궤를 버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다곤을 섬기던 제사장과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고민하던 유대의 지도자들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지만 속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바른 판단을 할 지혜도, 영적으로 분별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런 어둠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궤가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으며,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말씀 안에서 올바로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삶을 믿음의 향기로 채워 나가야만 합니다. 세상의 문제를 사람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항상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면 어려운 문제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소경이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의 궤를 들판에 버릴 수 있는 것이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우고 조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는 제사장과 복술자들이 언약궤는 그냥 보내면 안 되고 배상하는 의미에서 속건제를 드려야한다고 상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의 권리를 침해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손해배상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도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배상하는 자가 진심어린 사과를 하기 보다는 더 큰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꾀를 낸 것이라면 그 배상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배상을 할 때 받는 자가 도리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고 좋은 관계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고 빼앗은 언약궤를 이제는 하나님께 더 큰 재앙을 받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속건제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들은 속건제의 제물로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만들었습니다. 고대 이방인들은 자신이 섬기는 신에게 어떤 소망을 빌거나 감사의 표시를 할 때 그 내용을 형상화하여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질병의 치료를 원하면 그 질병의 모습을 금이나 은으로 형상화하여 신에게 바쳤고, 해방된 노예는 쇠고랑을 신전에 바쳤으며, 승리의 검투사는 자신의 검을 신에게 바쳤습니다. 지금 이들이 쥐 모양으로 제물을 만드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은 쥐로 인해 전염되는 페스트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속건제는 반드시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성물이나 사람에게 해를 깨치는 죄를 범했을 경우에 그 죄를 사함 받기 위해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린 것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피해자에게 피해를 당한 물품의 보상 외에 별도로 1/5에 해당하는 금액을 배상금으로 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블레셋 사람들은 진노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이 속건제를 생각해 냈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들은 애굽 사람들과 바로가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더 큰 재앙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는 자기들이 더 큰 재앙을 받기 전에 언약궤를 보내는 데 합의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큰 재앙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재앙만 보고 하나님을 멀리할 것이 아니라 그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의 권능에 굴복했어야 합니다. 드러난 현상만 보고 얕은꾀를 내어 피하려고 하기보다 그 재앙을 내리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속건제를 생각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는 두려움보다는 궤와 예물을 보내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겠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판단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명령하신 속건제와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드리는 이 속건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성도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드리는 예배와 기도 그리고 봉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와 기도와 헌신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곤 신상을 무너뜨리고 다섯 방백을 독종으로 치시며 쥐로 인해 많은 인명이 죽음을 당하는 고통을 경험했다면, 그런 역사를 일으키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깨닫고 돌이켰어야 합니다. 하지만 블레셋처럼 당면한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가식적인 믿음을 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죄입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만 보는 사람은 결국 또 다른 문제를 만날 수밖에 없고 또 다른 재앙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인생은 재앙을 만날 때마다 속건제를 드려도 그 속건제가 형식적인 것이므로 또다시 재앙을 만나고 속건제를 드리는 일상을 반복하게 될 뿐입니다.

재앙을 만나야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재앙을 피하기 위해 궤를 멀리 보내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숭배하는 다곤 신을 치는 위대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무릎 꿇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자신이 섬기는 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고 궤를 멀리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은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젖 나는 암소 두 마리에게 그 수레를 메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송아지들은 어미에게서 강제로 떼어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어린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는 암소는 절대로 송아지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런 어미 소의 마음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만약 암소가 송아지를 버리고 벧세메스로 가면 자신들이 당한 모든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린 것이 맞지만, 암소가 그 본능대로 송아지를 떠나지 못한다면 전염병이 우연히 생긴 것으로 여기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런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기준과 생각으로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것인지 우연히 일어난 것인지를 판단해 보겠다는 어리석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어리석은 인간들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무릎 꿇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인지 우연인지를 판가름하기 위해 자신들의 운명을 한낱 암소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불행이나 재난이 일어나면 그 일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 일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일을 판단함에 있어 손에 침을 뱉고 손바닥을 치면서 좌로 튀면 하나님의 재앙이고, 우로 튀면 우연이라고 혼자 정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행동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모든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연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성도들도 자신이 믿음으로 온전한 삶의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누구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아서, 경제가 어려우니까’라는 핑계거리를 찾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모습은 짐승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블레셋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전혀 다르지 않은 신앙입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우연을 바라며 자신들의 인생을 짐승인 암소에게 맡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는 지혜로운 자녀들이므로 어리석은 인간적인 판단에 인생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잠언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성경은 사람이 아무리 자기의 행위를 스스로 모두 깨끗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짓된 마음을 가졌을 때,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깊은 마음까지 살피시는 분이시므로 절대로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솔직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는 자녀를 책망하시는 분이지만,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는 성도를 은혜로 감싸주시며 그가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도록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블레셋이 아무리 겉으로는 속건제의 형식을 빌어 재앙을 막아보려 노력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판단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블레셋이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이 두려워서라도 하나님 앞에 굴복했다면, 그들을 용서하셨을 것이며 그들에게도 은혜를 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사람의 연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 주시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도 은혜를 받지 못했던 블레셋 사람들과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도 온전한 믿음을 드리지 못해 실패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모두 동일한 죄인들입니다. 그 죄가 결국 그들을 사망으로 몰아넣었고, 죄로 인해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안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영원한 생명을 담는 그릇입니다. 말씀은 천국에서 받아 누릴 축복으로 연결돼 있는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언제나 자신의 죄를 자복함으로 믿음을 벗어나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사무엘상 6장 10절-7장 2절

10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13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4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15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16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17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18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19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1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7:1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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