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 외에는 그 어떤 신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 어떤 것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조차 이방인들이 믿는 신을 믿으며 미신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미신을 믿는 이유는 그것이 형상이든 사람이든 눈에 보여야만 안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13일의 금요일이 불길하다고 하여 그날은 특별히 조심하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다리나 삼각형 모양의 밑으로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고 믿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거울이 깨지면 7년간 불행이 닥칠 징조라는 미신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길을 가다가 빗을 주우면 재수가 없고 밤에 손톱을 깎으면 어머니의 수명이 짧아지며 문지방에 앉으면 건강이 나빠진다고 하여 문지방을 밟거나 앉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미신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어머니께서 문지방을 밟지 말라거나 앉지 말라는 말씀을 하실 때마다 무슨 이유일까 궁금할 때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놓여 있다는 말씀을 읽고 혹시 이 사건이 전해진 것이 아닌지 혼자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복을 맹목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화가 된다는 말은 무조건 들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당신이 굿을 하지 않으면 혹은 부적을 갖지 않으면 혹은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나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을 전해 주면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그 말대로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왜 그 일이 발생할 것인지 근본적으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은 복을 받기 위해서 지키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날이고, 성도들과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귀한 날이므로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해서는 안 되는지 말씀해주시고 그 명령을 거역했을 때에는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순종하는 것이 지혜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영원한 복을 허락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 복을 허락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복술자의 탐욕스러운 마음에 속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면 채찍을 바로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악한 생각과 행동을 거두지 않는다면 축복의 약속을 거두시고 연단을 도구로 훈련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상벌이 성도의 행위에 달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성도는 행위로 믿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복이고 영광이므로 사람이 드리는 정성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기도로, 헌금으로, 봉사로 정성을 드려야만 세상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하며 세상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므로 기복적인 신앙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려야만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셨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감사로 헌금을 드리는 것이고,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구원받은 성도의 관계를 잘 정립해 놓아야만 사탄의 미혹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에서 4절 말씀에 보면,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 빛이 생겨났고 빛과 어둠을 나누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첫날입니다. 창세기 1장 16절에 가서야 두 큰 광명체를 만드셔서 해는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달은 밤을 주관하게 하셨으며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면서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셨는데, 그날이 세상을 만드신 넷째 날입니다.
그렇다면 첫째 날 비추었던 빛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광명체를 만드셨기 때문에 빛과 어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날에 어둠을 비춘 빛은 말씀이며 생명이며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해와 달처럼 광명체가 세상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낮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이 만물보다 먼저 세상을 비추었고 그 빛이 세상에 임한 곳을 낮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빛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낮에 활동하는 사람과 같아서 온전하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잘 간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깜깜한 밤길을 걷는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죽은 자와 같이 아무런 계획도 판단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먼저 만드시고 그 빛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하게 볼 수 있도록 축복하신 은혜는 피조물인 사람들에게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원하신 빛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광명체를 믿고 섬기는 어리석은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치료하시며 때가 아직 낮이므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하며, 곧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신 동안은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만드신 것에 대해 설명하신 것이며 예수님께서 말씀이며 빛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렇게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높일 존재가 따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영광 가운데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사랑을 나눠줄 대상이 생겼기 때문에 기뻐하시며 보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은 오직 창조주이시며 절대자이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세상의 그 어떤 우상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무의미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의 타락은 지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가는 그들의 신앙을 비추어 보며, 과연 지금의 성도들은 그와 같은 잘못을 하고 있지 않은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있는 성막에서 절기를 지켰고,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셀 수 없이 많은 제사와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않는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 역시 셀 수 없이 많은 예배와 헌금을 드리고 있습니다.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 외에도 구역예배, 헌신예배, 부흥회 등 수없이 많은 예배의 이름과 형식을 빌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헌금 역시도 그 종류가 너무 많아 셀 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넘쳐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말씀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TV와 라디오를 켜기만 하면 설교가 쏟아져 내릴 정도로 말씀이 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홍수와 같이 많은 설교집 외에도 지금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설교들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손만 뻗으면 볼 수 있는 성경책이 눈앞에 있음에도 왜 성도들은 여전히 말씀에 무지한 걸까요? 수많은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시간만 채우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부적을 붙이듯이 예배 시간만 채우며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배는 평생의 시간을 드려도 열매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패하였고, 법궤마저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거듭나지 못한 신앙을 가지고 세상의 전쟁터에 나가면 믿음을 빼앗기고 길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줄기교회 성도들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지 않길 바랍니다. 날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고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가장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열납하셔야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서 언약궤를 빼앗긴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의 궤를 빼앗았다고 승리를 자축하며 하나님의 궤를 다곤 신전으로 가져간 블레셋이나 모두 똑같이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입장에서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궤를 전리품으로 빼앗았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처럼 성도가 성화되지 못한 것 자체가 사탄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15장 47절에 보면, 아스돗은 여호수아가 유다 지파에게 분배해 준 기업이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아스돗을 분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분배해 주신 것은 유다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기만 하면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도록 도우시겠다는 약속과 같습니다. 유다 지파가 아스돗을 기업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복하지 못하자 도리어 그곳에 다곤 신전이 세워지고 블레셋이 애굽과 교역하기 위한 관문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나 재물 그리고 능력을 온전히 믿음으로 정복하지 못하면 사탄이 도리어 그것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도구가 됩니다. 자신을 높이는데 은사를 사용하도록 하여 교만해지게 할 것이고, 재물을 이용하여 세상의 쾌락을 즐기도록 만들 것입니다. 아스돗을 기업으로 분배 받은 유다 지파는 하나님을 믿고 목숨을 다해 정복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유다 지파는 자신들보다 더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던 블레셋을 보았기에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블레셋이 믿고 있는 다곤이라는 우상은 메소보다미아, 앗수르 지역에서 널리 숭배해 온 신입니다. 다곤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해양민족의 특성대로 물고기같은 ‘무수한 번식력’을 상징합니다. 또 하나의 뜻은, 그들이 육지에 정착하면서 땅의 비옥함과 땅의 열매를 상징하는 ‘풍요의 농경신’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돕는 신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의 풍요를 위해 만들어진 신들은 결국 사탄의 조종을 받습니다.
다곤 신당은 성막처럼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성소의 중앙 부분에 단이 만들어져 있고 그 단 위에 제단과 신상이 배치돼 있습니다. 블레셋이 아벡 전투에서 탈취한 여호와의 궤를 이 다곤 신당으로 가지고 가서 다곤 신상 곁에 두었습니다. 블레셋이 볼 때 하나님의 궤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요단강을 가르고 철옹성과 같은 여리고도 무너뜨린 전능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렇게 두려웠던 하나님의 궤를 한낱 쓸모없는 나무상자처럼 자기들이 탈취하자 아마도 다곤 신이 하나님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이 약해서 그들이 승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묻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을 알 수 없었던 블레셋은 지금 전쟁의 승리에 도취해 하나님의 궤를 하찮게 여기며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것을 너머 하나님까지도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은 것은, 곧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조롱하도록 만드는 빌미를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이 더 중요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조롱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연단하시고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시는 방법으로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셨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신 궤는 블레셋 안에서 스스로 역사하셨습니다. 다곤 신상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은 땅에 닿았고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진 채로 문지방에 있었습니다. 다곤의 몸만 남아 있었습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복을 위해 섬긴 다곤 신상이 하나님 앞에서 산산이 부서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여호와의 궤가 다곤 신상을 부순 사건은 스스로 죄인의 형상으로 어둠의 세상으로 오셨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었던 예수님의 행보와 같습니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서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세상은 다곤처럼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그리스도 앞에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조금 모자라도, 조금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세상의 조롱을 받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면 여러분도 여호와의 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나가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다가 세상이 두려워 여호와의 궤를 세상의 전쟁터로 가지고 나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도와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직 믿음 하나만 가지고 세상의 전쟁터에서 싸워보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 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과 능력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법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드리는 믿음이 더 귀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신으로 모시고 의지하던 다곤 신상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본 블레셋 사람들은 무척이나 놀랐을 것입니다. 사람의 전쟁은 곧 신의 전쟁이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는 것을 본 그들은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부서졌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역시 그렇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드리지 못한 자신들이 한심스러웠을 것입니다. 블레셋의 신 다곤을 한 번에 무너뜨리신 하나님의 백성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궤를 빼앗겼으니 두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믿음을 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역사를 행하시고 기적을 만드시며 적들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무조건 도우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에 거하시는데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성령의 능력을 믿어드리지 못한 불신앙 때문입니다. 성도가 의지하기만 하면 최선을 다해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어드린다면 험한 세상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죄의 길로 인도하는 사탄을 혼자 대적하지 마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과 함께 사탄을 대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은 물론 세상의 삶에서 승리하며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다곤 신상도 감히 서 있을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사무엘상 6장 1-9절
1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2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3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4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5그러므로 너희는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6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7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