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시속 100KM로 달려야 하는 도로에서 200KM로 달린다면 교통사고를 유발함은 물론 법에 저촉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지만 100KM로 제한하지 않은 도로라면 그 이상 달린다고 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법을 제정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욕심대로 살면서도 그것이 죄 인줄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사람이 힘껏 율법을 지켜도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에 다다를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고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 가야 한다는 것을 율법이 드러낸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선지자들을 통해 믿게 되었습니다. 구약에 살던 믿음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메시아를 만날 수 없었지만 믿음으로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로마서 4장 13절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 전에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5절에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이미 주어진 언약을 절대로 취소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인간의 판단과 결정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전혀 알지 못하는 가나안 땅으로 떠났으며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을 때 정직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없이 신뢰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초조함과 욕심으로 이스마엘을 낳는 죄를 짓기도 했습니다. 상속자를 다메섹사람 엘리에셀로 정하겠다는 어리석은 말씀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사라의 몸이 죽은 것 같이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아들을 빨리 낳지 못하자 초조한 마음에 인간적인 노력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어머니가 사온 선물을 이따가 주겠다고 하면 기다리지 못하고 온 집안을 뒤지며 찾아봅니다. 그러다 선물과 비슷한 물건이 있으면 이것이냐고 묻다가 혼나기도 합니다. 그것처럼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신다고 했기 때문에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정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라가 여종 하갈을 소개할 때 정말 이 방법으로 아들을 낳아야 하는 것인지 인간적인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때가 되면 주실 것을 믿는 성숙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약속하신 아들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할 때도 깊이 고민하고 결정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가자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아브라함은 인생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은 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깊은 믿음 위에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삭을 드릴 때 아브라함의 마음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려주셨을 때 그 말씀을 진심으로 믿는 믿음을 보여드렸습니다.
로마서 4장 23~24절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는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지금 우리의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시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얄팍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내 아들을 죽이지 않고 그냥 살려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삭을 향해 칼을 든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헌금 하면서 이것을 드리면 분명 더 많은 재물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삭을 번제단에 뉘였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 급하게 그를 불러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신제사를 받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수풀에 숫양을 미리 준비해 두셨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하나님의 계획을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삭이 살았다는 것을 알기에 이 장면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쉽게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세에 얻은 아들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아비의 마음도 그럴까요? 여러분은 혹시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나 가장 소중한 사람이나 재물을 잃었을 때 그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제물로 받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삭을 살려 주신 것을 알기에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비의 입장에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에게 네 아들을 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면 과연 갈등없이 순종할 수 있는지 지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영적으로 성숙했기에 기본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다고 믿지만 아들을 죽여야 하는 인간적인 아비의 마음을 알고 싶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잃는 것은 어쩌면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삭을 번제단에 뉘였고 칼을 들었습니다. 자식을 자신의 손으로 보내야 하는 현실에서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과연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통과 견줄 수 없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잠깐 제 간증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슬프게도 제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3일을 한 자리에 앉아서 식음을 전폐하고 밤을 새우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선한 방법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인간적인 고민을 거듭하자 5Kg이 빠졌습니다. 아마 아브라함도 이삭을 바치기 전 이런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울고 기도하기를 반복하면서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에서는 몸이 찢기는 아픔이 온 몸을 감싸고 있는데 제 영은 점점 평안해지기 시작하면서 육과 영이 분리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너무 아픈데 영은 평안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듯한 이 기분이 솔직히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내 영혼 위로 진공 상태와 같은 공간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공간에 하나님과 나 둘 뿐인 것처럼 하나님께만 집중이 되었습니다. 지금 일어난 일이 또렷하게 보이면서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졌고 내 영은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되어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습니다. 그 공간에는 육신을 가진 나 말고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육은 계속해서 저에게 말하기를 이렇게 힘든데 너는 내일 설교를 해야 되느냐고 너는 사지가 찢기는 고통을 당하는데 도대체 누굴 위한 설교를 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순종과 아픔 사이에서 이런 인간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고통을 과연 누가 알 것이며 믿음의 조상으로서 사명을 감당한다고 하지만 아들을 죽여야 하는 잔인한 현실이기 때문에 그 아픔은 짐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때 제 육신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강하게 눌려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영은 하나님께 더 집중했고 오늘 육신을 벗고 하나님을 만난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때 제가 이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힘겨워 하는 제 육신의 소리와 하나님께서 주신 목회자라는 사명 중에 제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하나님과 둘이 있는 이 공간을 채울 수 있는 답이 되는지 계속해서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절망하는 육을 강인해진 영이 다스린다는 기분이 들면서 육이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강해지자 그래도 인간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소리치는 육이 제어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들을 살리고 싶은 아비로서의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선지자로서의 아브라함은 엄청난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갈등을 이겨냈기에 이삭을 드릴 수 있는 결단을 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공격했던 압살롬이 죽자 울부짖으며 아들의 이름을 간절하게 부른 것을 보면 일반적인 부모의 마음이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아브라함 역시 다윗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상태에서 아들을 번제단에 뉘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누군가 아들을 죽여야 하는 그의 인간적인 아픔을 조롱한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녀를 죽일 결심을 할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지만 보좌에서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벌리셨던 그리스도를 보았기에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천사의 얼굴 같이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히자 이삭을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자신이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것을 들어서 알기는 했지만 실감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겪는 고통은 너무나 컸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그리스도의 큰 계획을 들었기 때문에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죄인을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아픔과 희생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함께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고통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아버지로 섬길 수 있게 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떤 증거를 보여줘야만 아버지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아버지이며 생명을 주신 창조주로 믿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갈등을 이겨내면서 영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갈등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없어 보일 수 있겠지만 이런 갈등과 고민을 하면서 선한 결정을 하는 것이 바로 성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행위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고 약속은 파기되었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면 율법보다 몇백 년 전에 보여드렸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다고 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면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의 조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 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로마서 4장 18~20절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자신과 사라는 도저히 아기를 잉태할 수 없는 몸을 가졌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기다린 것을 말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고도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역시 사람이기에 두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도 했고 조급한 마음에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으며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해 종인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겠다는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의를 인정 받은 사실에 입각하여 본다면 하나님께서 후사를 주겠다는 말씀을 들은 그는 주실 때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신이 그 약속을 이루려고 행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을 주실 것을 믿지만 자신과 사라가 늙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두려움과 인간적인 조급함으로 아들을 갖기 위한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잘못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에 저지른 실수였습니다. 우리도 도와 주실 것을 알면서도 조급한 마음에 나름 일을 해결해 보려고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하다가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결함이 많은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신 것은 그 마음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했을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이 같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어쩌면 빠른 시일내에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의 잘못은 사도 바울이 한 고백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2~25절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육체를 가진 사람은 죄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사망을 이겨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아브라함도 약속을 믿었지만 사도 바울처럼 유혹을 받을 때마다 연약한 인간의 감정을 이겨 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과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했고 육을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삭에게 번제단에 누우라고 했을 때 아버지의 신앙을 존경했기에 기꺼이 누운 것을 보면 평상시 아브라함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이삭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구원에 관해 잘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기둥에 묶여 있는 고무줄처럼 인간의 욕심은 늘어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경험을 했고 이삭을 드릴 만큼 영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고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면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에도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살 수 있는 지혜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고도 기다리지 못한 것은 자신이 때를 정했기 때문이며 육신의 욕심을 이겨내지 못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면 고난을 당할 때마다 믿음은 더 강해지면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알려주는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은 인내를 키워 주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계획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어야만 고난을 통해 인내를 배우게 되고 하나님 뜻대로 성장하는 성도가 됩니다.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통해 이어질 믿음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하신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시편 102편 17~21절
17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 18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9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20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21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일하시는 데 반드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응답하시는 것은 믿음을 고백하는 많은 백성들의 찬양을 듣기 위해서 입니다.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이 땅을 살피시는 것은 죄에 갇힌 자의 탄식을 들어 주시고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자신의 의를 자랑하며 행위를 통해 구원의 삯을 내려고 한다면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구약사람들의 구원은 앞으로 실현될 약속을 믿은 것이고 신약시대 성도들은 대속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이 일했고 경건했으며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말을 한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보다 더 분명한 사랑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려주셨고 자신을 사망에 던져 사람들을 구원하신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직도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지 상징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의 죄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의로움을 위한 근거가 됩니다. 이런 사랑을 받고 있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신을 사망에 던지시는 사랑을 보여주셨는데도 아직도 세상을 탐하는 육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그 손을 놓아 버리실 것입니다. 이제 못자국이 있는 주님의 손을 꼭 잡고 달려 보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과 여러분 둘만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집중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암흑과 같은 마음을 찬란한 빛이 밝혀주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아들을 바쳤던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 여러분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로 살아 주기 바라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거룩한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